국내 육종 '수미'의 곧고 순수한 매력 알리는  

졸업시즌으로 꽃 소비가 활발한 지난 2월 화훼농장을 찾았다. 소비가 많은 계절인 만큼 시설하우스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많이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농장을 찾았다. 시설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선 농장에서 나도 모르게 당혹스런 비명이 나왔다. "어?" 농장은 내가 생각했던 노랑, 빨강 꽃이 핀 화려한 곳이 아니었다. 나를 반긴 것은 형형색색의 꽃 대신 튼튼한 줄기를 곧추세운 흰 국화였다.

"왜 흰 국화 농장이라 실망했습니까?" 뜨악한 표정을 본 농장 대표가 내 마음을 읽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대평리 89번지에 있는 지산화훼 전수익(62) 사장이다. 희끗희끗해진 머리가 이미 반백을 넘었지만 강한 농부의 포스가 탄탄한 몸매에서 품어나온다.

국내 육성품종 '수미'로 국화시장 도전

전수익 사장이 재배하는 흰 국화는 국내 장의용 시장을 차지하는 일본 품종 '신마' 대신 로열티 한 푼 들이지 않는 '수미'라는 국내 육성 품종이다. 경남도농업기술원 화훼연구소 진영돈 박사가 5년 전 개발한 이 품종은 흰색의 단아한 자태가 인상적이어서 장례용으로 아주 인기가 높다.

전 사장은 5200㎡(1570평) 시설하우스에서 아내 박둘숙(57) 씨와 일하는 사람 두 명과 함께 수미 국화를 재배해 연간 2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강소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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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15년간 국화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이젠 국화농사만큼은 어딜 내 놓아도 자신 있습니다. 우리가 재배하는 국화는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서울 양재동 화훼공판장에서도 최고로 인정받는 상품입니다."

전 사장의 국화 재배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전 사장은 연간 생산하는 흰 국화는 40t(80만 본)으로, 이 중 일본에 10t을 수출하고 나머지 30t은 내수용으로 판매한다. 연매출 2억 원 중 직원들 인건비와 시설보수비, 농약·비료·전기요금 등 제 경비를 빼면 순익은 8000만 원 정도 된다.

도시 직장인, 화훼농 변신했다 혼쭐

그는 어떻게 화훼 농사를 짓게 된 것일까?

"원래 창원공단에서 직장생활을 했었습니다. 근데 나이 40을 넘기면서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서서히 직장에서 밀려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죠. 내 일을 하고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래서 직장생활을 접고 동생들과 4년 동안 양계장 자동화 사업을 했는데 썩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고향마을 주위에서 화훼 농사를 짓는 것을 자주 보게 돼 자연스레 관심을 두었고, 1998년 화훼농사를 하겠다며 완전히 귀농하게 됐습니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개인사업을 했고, 농사와 관련된 개인사업을 하다 보니 화훼농사까지 짓게 됐다는 전 사장의 이력이었다. 요즘 명퇴 등으로 귀농·귀촌인들이 늘면서 준비 없이 농사일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하는 사례가 많은데 전 사장이 귀농해 정착하는 단계가 여느 귀농인들과 달랐다. 이런 이력이 국화 재배로 강소농이 된 배경이 됐으리라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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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하지만 그의 대답은 달랐다.

"처음부터 국화를 재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계장 사업을 접고 그는 고향 마을에서 마음이 맞는 10여 명과 함께 장미를 키웠다. 초기엔 자금이 많이 들어가는 탓에 서로 보증을 서가며 농사를 지었단다. 하지만 10여 명 모두 소규모이다 보니 타지역 장미재배 농단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2년 동안 하루도 쉴 틈 없이 장미를 재배했지만 남은 것은 집이었다. 결국 2년 만에 10명 모두 1억∼2억 원씩 적자를 보고 접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5명은 견디지 못하고 야반도주까지 했단다.

"참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서로 연대보증을 선 탓에 연쇄 부도로 경매에 들어가 모두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재산을 날리게 됐죠.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있습니다."

화훼농의 길로 들어선 초보 농군 전 사장이 겪은 대가는 혹독했다. 하지만, 인제 와서 돌이켜 보면 당시 전 사장에게 닥친 시련은 그가 강소농으로 성공하는 보약이 된 셈이었다.

끝나지 않은 시련, 또다시 위기

장미 농사의 실패를 뼈저리게 겪고 난 뒤라 국화 농사는 장미에 비할 게 아니었다. 국화를 처음 재배했을 땐 사실 주변 여건도 아주 좋았다. 당시만 해도 시설하우스 난방용 연료비 부담도 적었고, 인건비도 싸 제법 농사지을 만했단다. 더구나 농사는 정년이 없기에 나이 들어서도 안정적인 직업이 되겠다 싶어 스스로 잘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이젠 마음 좀 느긋하게 먹고 편하게 농사짓게 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강소농 대부분이 겪는 과정 중 하나가 성공했다고 방심하는 순간 당하는 시련이었다. 전 사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화 농사를 시작하고 2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바로 태풍이었다. 지난 2003년 추석 연휴에 경남을 강타한 태풍 '매미'는 전 사장의 시설하우스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시설하우스 전체가 폭삭 내려 앉아버렸던 것이다. 그동안 들인 노력이 한순간에 모두 물거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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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하늘도 참 무심하다 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자신도 생겼고, 국화 농사에 재미를 붙여 성공을 꿈꾸는 중이었는데 태풍이란 자연재해를 만날 줄은 몰랐지요. 물론 농부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순 없겠지만 무너진 시설하우스를 보니 기가 찼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시 일어서야 했다. 꼬박 2개월 동안 쓰러진 골조들을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 창원공단에서 직장생활을 한 경험이 시설하우스 복구에 큰 도움이 됐다. 남들 같으면 모두 하우스 복구를 다른 사람 손에 맡겨야 했겠지만 전 사장이 직접 근로자들을 데리고 작업하다 보니 남들의 3분의 1인 1억여 원의 비용으로 복구,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베풀 줄 아는 삶, 농민과 국화재배 노하우 공유

전 사장의 국화 재배기술은 이제 도내에서 국화를 키우는 농민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가 수확한 국화는 이미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알려져 최상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작년에만도 엔저 심화로 수출농민들이 어려움을 겪어 수출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 사장은 상품성을 인정받아 8t을 수출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그렇지만 전 사장은 점점 더 국화시장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국내 시장만 해도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이미 중국에서 우리나라 생산량의 3배 가까운 물량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 들어오는 국화는 저가품이 많은데 국내 화환업자들이 우리가 생산하는 국화가 좋은 줄 알지만 워낙 싼 값에 중국 국화가 들어오니 당연히 꺼리게 됩니다. 장례식장 등에서 사용하는 꽃인데 굳이 비싼 돈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전 사장은 이를 타개하는 방법은 많은 농민이 국내육종 품종인 '수미'를 많이 재배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수미' 재배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전국적으로 확대돼 생산량이 많아지면 중국의 질이 낮은 저가품을 막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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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요즘은 주위 농민들을 대상으로 재배기술 보급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국화 재배단체인 마산국화수출농단 총무이사와 (사)경남절화연구회 수석부회장을 맡아 열심히 재배 노하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 사장은 농가 기술전수를 통해 관비 재배 중요성도 강조한다. 관비 재배란 관행적으로 해 오던 농사짓는 방법에서 탈피해 호스(관)를 통해 국화 포기마다 뿌리 근처에 비료성분이 든 물을 공급함으로써 품질이 우수한 국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수확할 수 있는 재배법이다. 관비 재배는 또한 잦은 비료 보충으로 토양 속에 있는 특정 양분이 과다해지는 것을 막아 토양오염과 수질오염까지 예방한다. 특히 관비 재배는 일손이 적게 들 뿐만 아니라 비료나 농약살포에 드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등의 이점도 있다. 전 사장은 경남도농업기술원 강소농지원단 이상현 박사로부터 이 관비 재배법을 전수받고 주변 화훼 재배 농민들에게 관행 농법 탈피를 강조하고 있다.

"정년 없는 화훼농사, 앞으로 10년 더 지을 것"

전 사장은 국화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보람이 있었던 일로 '마산가고파국화축제'를 명실 공히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을 꼽는다. 전 사장은 6년째 사무국 일을 하고 있는데 국화를 재배하는 농민으로서 뿌듯할 법도 했다.

"처음부터 국화를 재배한 것은 아니지만 40대에 귀농해 가장으로서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 다 하고 출가시킨 것은 다 국화 농사 덕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오로지 농사만 짓는 농부가 아니라 내가 가진 지식을 남들에게 나눠줄 수 있을 만큼 재배기술을 가졌다는 게 보람이지요. 하지만 국화를 재배하는 사람으로서 내 고장 마산에서 열리는 국화축제를 세계 명품축제로 만들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가치가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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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인터뷰 내내 궁금한 것이 있었다. 도시에서는 나이 60이면 대부분 현업에서 물러난 시기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청춘과 같은 열정을 지니고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정년이 없는 농사라고 했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이 일을 할 거냐고 물었다.

"앞으로 한 10년, 70살 정도 되면 농사일을 그만둘까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고요, 그때가 되면 10년쯤 더 농사를 지어야 하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농사를 농사로 생각하지 않고 내 건강을 돌보는 운동으로 생각한다면 계속 농사를 짓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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