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목표 없어요. 그저 관객과 소통하며 붓을 놓지 않고 싶어요"

지난 한해 누구보다 바쁘게 작업했던 젊은 화가 노은희(34) 씨.

지난해 봄부터 겨울까지 개인전·단체전 20여 회에 참여하며 인지도를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있다. 국내외 아트페어 현장에서는 부스를 지키며 관객과 마주했다.

그녀는 '비밀 없는' 작가다. 페이스북으로 작업을 공개하고 관객과 허물없이 소통한다. 기자가 가는 곳마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어느 작가보다 가깝고 친근한 느낌이다.

올해 더 바쁠 것 같다는 그녀를 1월 13일 작업실에서 만났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한국화에 매력을 느끼다

'화가의 작업실'이라는 단어는 꽤 낭만 있게 들린다.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반 고흐의 방'이 생각나고 여러 명화에서 등장하는 화가의 아틀리에도 연상된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않다. 햇볕만이라도 잘 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작가들이 많다.

20150113010307.jpg
▲ 노은희 작가./김구연 기자

노은희 작가의 작업실은 창원시 사림동의 한 주택가에 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는 반지하라 겉으로 보기에는 창고 같기도 하다.

"세 사람이 함께 쓰는 작업실이에요. 제 공간은 안쪽입니다."

그녀가 자리를 안내했다. 30평 규모라는 작업실 곳곳은 책상 서너 개와 소파, 작품들, 재료들로 빼곡했다. 작업실 맨 안쪽, 좌식 책상과 벽면에 걸린 그녀의 작품들이 보였다.

노은희 작가는 한국화를 그린다.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작업실을 함께 쓰는 작가는 대학 선후배들이다.

김해 진영에서 자란 그녀는 인문계고등학교를 나왔다. 대창초등학교, 진영여자중학교를 거쳐 마산여자고등학교에 갔다. 진영에서 마산 완월동까지 '봉고차'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그 시절 고등학교가 밀집한 마산 산복도로를 달리던 봉고차는 흔한 풍경이었다.

처음부터 화가가 꿈인 학생은 아니었다.

학창시절 교내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고 중학교 미술 교사에게서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권유받았지만 그림을 좋아할 뿐이었다.

"고3을 앞두고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법대냐 미술대냐를 두고 했지요. 법조인도 되고 싶었거든요. 결국에는 미대 진학을 마음먹었지만요."

그녀가 미술을 좋아하는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다.

20150113010246.jpg
▲ 노은희 작가./김구연 기자

건설 쪽 일을 했던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았단다. 만들기 숙제가 있는 날은 언제나 아버지가 팔을 걷어붙였다.

할머니도 그림을 좋아했다. 할머니 댁 뒤주에 버려진 물건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손으로 만들고 그리는 게 좋았어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했고요. 미대 입시 준비는 학원에서 했습니다. 인문계고등학교였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거든요. 제가 한국화를 그리게 된 것도 어쩌면 학원에서 결정됐어요. 당시 학원 교육이 한국화와 서양화, 조소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본보기로 나와 있던 작품 중 한국화가 마음에 들었어요. 한마디로 즉흥적이었죠."

신미화, 여윤경 작가와 그리는집

2000년 창원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짬이 날 때마다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했다.

한국화를 그리며 다른 장르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한 번 정한 것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성격이다.

노은희 작가는 대학에서 채색화를 배우며 한국화의 매력에 더 빠졌다. 단청이나 십장생, 민화에서 보듯이 한국적 채색화가 아름답다고 했다. 

그녀의 초기 작품을 보면 색채가 두드러진다.

대학 졸업 후에도 한눈을 판 적 없다.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집에서 작업했다. 하지만 번듯한 작업실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150113010289.jpg
▲ 노은희 작가./김구연 기자

"아무래도 작업실이 있으면 좋죠. 작업실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대학 선배인 신미화 작가와 대학 후배인 여윤경 작가도 작업실을 구하고 있었어요. 의기투합해 이리저리 찾아다녔죠. 경남도청 후문에 있는 10평짜리 반지하를 구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작업실을 쓰고 있답니다."

좁은 공간에서 작가 3명이 작업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 넓고 밝은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월세가 저렴하면서 조건이 좋은 곳은 없었다.

그때 마침 창원 사림동에서 작업하던 김미옥 선배가 창원을 떠나게 됐다. 선배는 다른 사람 주기 아깝다며 작업실을 쓸 후배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지난 2011년 세 사람은 창원 사격장 아래에 있는 볕이 잘 드는 곳에 새 둥지를 마련했다.

"여자 셋이 모이니 다들 싸우지는 않는지 물어봐요. 우리는 아주 잘 지내요. 작업 스타일이 달라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지요. 같이 놀고 전시회도 열고요."

신미화, 여윤경 작가도 창원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신미화 작가 작품은 한국화 같지 않다. 의자와 쿠션을 자주 그리는데 유화나 사진처럼 보인다. 여윤경 작가는 컵과 선 작업이 강하다.

노은희 작가는 달항아리와 자개에 집중한다.

이들은 지난해 5월 '그리는집'이라는 이름으로 창원 스페이스 1326(창동예술촌 내)에서 전시를 했다. 작업실 3인방과 대학 동기 송남규 작가와 함께 연 전시였다. 2012년부터 매년 정기전을 연다.

20150115010148.jpg
지난 12월 28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렸던 서울아트쇼 모습./노은희 작가 제공

"그리는집은 계처럼 운영해요. 매달 3만 원씩 모으죠. 전시를 열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사실 전업 작가로 돈을 벌기란 쉽지 않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동마다 있는 창원시 평생교육센터에서 그림을 가르친다. 월·화·수·토요일이 일을 하는 요일이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이렇다.

매일 아침 밀양에서 국도 25호선을 타고 창원으로 온다. 일과 작업을 끝내면 다시 밀양으로 간다. 지난해 김해에서 이사를 했단다.

"최근에 일을 줄였어요. 일에 치이니 작업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열 수 있는 만큼만 벌고 있어요. 작업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갤러리 스페이스 1326과의 인연

그녀는 지난해 여러 단체전에 참여했다.

'CH61', '경남전업특별전', '창원청년작가회정기전', 'YKA (Young Kyoungnam Artists) #1', '동행전' 등이다.

CH61과 동행전은 창원대학교로 묶인다. 창원대 미술학과 00학번 학생들이 2004년부터 CH61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연다. CH는 창원대의 영어 이니셜, 61은 미술학과가 있는 건물 번호를 땄다. 동행전은 창원대학교 미술학과 동문이 모여 여는 전시다.

경남전업특별전과 창원청년작가회는 소속된 지역문화단체다.

반면 YKA #1은 새로운 만남이었다. 그림갤러리(창원시 마산합포구)와 갤러리 스페이스 1326(창동예술촌 내)이 공동 기획한 'Young Kyoungnam Artists(젊은 경남 아티스트)' 전시였다. 감성빈, 강동현, 강창호, 듀, 여원 작가도 함께했다.

노은희 작가는 2년 전 스페이스 1326과 인연을 맺었다. 인연은 그녀의 현재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강대중 스페이스 1326 대표와 재작년에 만났죠. 당시 '이력서'전이라는 다소 특이한 전시회가 열렸는데 신선하더라고요. 20~30대 젊은 예술가들의 또 다른 자화상을 조명하는 자리였죠. 이후 강대중 대표와 함께하면서 여러 젊은 작가들을 만났죠."

그녀와 스페이스 1326은 끈끈하다. 강대중 대표는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할 때마다 소속 작가에 노은희를 빼놓지 않는다.

지난해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 경남국제아트페어, 싱가포르 뱅크아트페어, 서울아트쇼에도 함께 했다.

"작년 6월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를 잊지 못해요. 제가 처음 나갔던 아트페어거든요. 작품도 팔렸어요. 40대 여성분이었는데 제 작품을 좋아해 주셔서 아주 고마웠어요. 그분과 연락하고 지냅니다. 전시회 소식도 알려드리고요. 지난해 스페이스 1326에서 개인전을 열 때 직접 와주셨어요."

과감하게 작업 모습을 공개하는 탈 신비주의 작가

노은희 작가는 '신비주의'가 아니다. 페이스북으로 작업 모습을 공개한다.

"페이스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작업실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게 되더라고요. 재밌어요. 다른 작가를 알게 되고 소통도 하고요. 그런데 걱정하는 선배들도 많아요. 자신만의 작업 스타일과 노하우를 알려주지 않는 게 좋다고요. 저는 생각이 조금 달라요. 아무튼 페이스북은 부작용을 최소화하면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재미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작업에 대한 자신감과 힘듦이다.

'빛'을 주제로 작업하는 노은희 작가는 한지에 먹을 칠하고 달항아리 등을 그린다. 항아리 안에 복을 쌓듯이 차곡차곡 빛을 담는데 빛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양하다.

일일이 선을 그리기도 하고 자개로 반짝임을 표현한다.

작업 강도가 엄청나다.

"최근에 선보인 '빛 담다', '빛 내리다' 시리즈는 주로 먹과 자개를 이용한 작업들이에요. 얇은 선을 긋고 아주 잘게 부순 자개를 아교로 붙입니다. 원하는 형태에 하나씩 붙여야 원하는 느낌이 살아요. 일일이 손으로 하기 때문에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려요. 그래서 한날씩 정해 먹, 자개, 선 긋기만 해요."

그녀의 페이스북을 보면 눈이 아프고 삭신이 쑤시다는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다른 작가들도 저처럼 작업할 수 있어요. 할 수만 있다면요.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예요. 온몸이 저린 작업이거든요."

20150115010147.jpg
노은희 작 '빛, 담다'./노은희 작가 제공

오는 봄, 그녀가 기대된다

노은희 작가는 오는 5월 아츠풀 삼진미술관(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초대 개인전을 연다. 지난해처럼 스페이스 1326과 아트페어에 참여하고 그리는집전, 동기전, 동행전, 경남전업정기전 등 매년 참여하는 전시도 비한다. 여건이 된다면 평소 생각해두던 전시도 하고 싶단다. 젊은 작가들과 함께.

하지만 큰 욕심이 없다. 거창한 목표도 세우지 않았다.

"어릴 적엔 목표, 되고 싶은 것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작업을 할수록 그런 마음이 사라졌어요. 작업 자체에 집중해 더 나은 작품을 선보이고 싶거든요. 저는 붓을 잡고 있는 모든 작가를 존경합니다. 학부시절 강사선생님이 '붓을 놓지 않고 오래 잡는 게 이기는거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땐 한 귀로 듣고 흘렸거든요. 10년 넘게 작업을 하니 그 말이 정말로 와 닿아요. 붓을 꺾지 않고 오랜 세월을 버텨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을 가치가 있어요."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노은희 작가.

오는 봄, 그녀가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은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