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바닥에서 나락은 여물고

"수매? 그기 머꼬? 안 한지 오래 됐구만. 쌔빠지게 해봤자 돈도 안 되는 거 말라꼬 하끼고. 이것도 기계 빌려쓰는 거 하고 비료값 빼모는 남는 기 없다아이가. 그냥 내 묵을 거 하고 자식 새끼들헌테 보낼 거나 하제."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동호마을 국도 60호선 도로가에서 운서띠기(77) 아지매가 혼자 쪼그리고 앉아 일을 하고 있습니다. 널어놓은 나락에 섞인 시커먼 쭉정이들을 골라냅니다. 무릎 관절이 안 좋아 한 번 앉으면 일어서기보다 아예 기어 다니며 하고 있습니다. 평생 일에 굳어진 손은 그리 날래지는 않습니다. 

지리산 둘레길 구간인 동강교 위에는 겨우 자동차 한 대 지나갈 폭만 남기고 다리 폭의 반은 이미 나락이 차지했습니다. 길이대로 좌악 널려있습니다. 나락 주인은 집으로 밭으로 바삐 오다가다 생각난 듯 한 번 씩 나락을 뒤섞어 주기도 합니다.

다리 위에서 자혜띠기(76) 아지매를 만났습니다. 콩을 베어오는 길인지 바퀴가 세 개 달린 리어카에는 콩대들이 한 가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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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원기마늘 자혜띠기(76) 아지매./권영란 기자

"콩농사야 짓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금이 좋쿠만. 근디 몸에 좋다허니 안 팔고 고방에 잘 뒀다가 자식들헌테 주는 게 낙이제. 메주도 만들고 두부도 만들고 방앗간에서 볶아와서 먹기도 허고 여름에 콩국도 해묵어야 허고…. 수입산이 많고 국내산은 비싸서 못 사먹는다꼬 그리쌌는데…."

상강 무렵입니다. 가을걷이가 다 끝났을까 싶은데 길을 떠나보니 곳곳마다 눈에 들어오는 건 서둘러 일하는 손길입니다. 

며칠 있으면 수매하는 날입니다. 1등급을 받아도 40kg 한 포대가 지난해는 5만 5000원입니다. 수확량이 30포대 정도가 되어도 150만 원이 조금 웃돌 뿐입니다. 거기서 트랙터 빌려 쓴 것, 운임료, 농약과 비료값 제하고 나면 반이나 남을까 싶습니다. 

여름 내내 사람 그림자도 없던 마을에서 길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조용하기만 하던 들판에서는 트랙터 소리도 요란하게 울리고 멀리서 사람 부르는 소리도 울립니다. 

타작은 했지만 아직 다 여물어지지 않은 나락은 대부분 지열이 좋은 시멘트나 아스팔트 한 쪽으로 널어놓습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서로 순서를 정해 돌아가며 말립니다. 좁은 마을길에서 경운기라도 만나면 뒷걸음치거나 쫄쫄 따라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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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앞 동강교. 다리 위에 나락을 널어놓고 말리고 있다./권영란 기자

지나치다가 문득문득 되돌아봅니다. 경운기를 끄는 사람도, 나락을 널었다가 다시 담는 사람도, 가마니를 옮기는 사람도, 콩타작을 하는 사람도 환갑을 훌쩍 넘은 이들입니다. 얼굴 주름이 느릅나무 껍질 같기만 합니다. 어느새 굽어진 몸피는 집 뒤 오래된 소나무를 닮았습니다. 

정부 수매가는 점점 하락합니다. 농가의 현실적인 보장이 안 됩니다. 때 되면 씨 뿌리고 일하고 거둬들이지만 전혀 신명이 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다 쌀 관세화가 통보되고 내년부터는 지금까지 강제되던 의무사항이 없어지게 됩니다. 어이없이 국내 농업과 쌀 시장은 아무런 대책 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습니다.

나락을 잔뜩 실은 경운기가 탈탈거리며 농로를 따라옵니다. 운서띠기 얼굴도 자혜띠기 얼굴도 흑백으로 흔들립니다. 기우는 볕살에 미처 타작을 하지 못한 나락논이 황금빛으로 떠오르다가 금세 흑백으로 가라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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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금서면 자혜리 들판./권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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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다랑이논. /권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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