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서점 28년, 시대정신과 지역문화 함께 해왔다

여태훈(52) 진주문고 대표는 28년째 진주에서 서점을 하고 있다. 지역 서점인으로서는 드물게 전국 출판서점업계에서 ‘알아주는’ 서점인이기도 하다. 50줄을 넘긴 사람이라면 30년 가까이 한 가지 일을 해왔다는 것이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을 터이다. 하지만 60년 된 통영의 이문당 서점이나 광주의 충장서림처럼 수십 년 된 지역의 토종 서점들이 잇따라 문을 닫는 현실 속에서 그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서점을 더 키워왔다는 점에서 경청해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손님과 같이 데모하러 가던 서점주인?

여태훈 대표는 1986년 경상대학교 앞에서 ‘개척서림’이라 해서 인문사회과학 전문 서점을 차렸다. 그로부터 2년 후, 시내 중심가에 ‘책마을’이라는 출판문화공간으로 확장 이전했다. 이어 91년에는 진주문고라고 해서 일반적인 서점으로 변신했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운영하고 있다.

99년 IMF 사태가 진행중이었고 다들 어렵다고 할 때 그는 지금 위치인 진주시 평거동으로 이전하면서 서점을 확장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역발상에 바탕한 것이었는데 한 때는 진주시내에 지점을 3곳이나 운영할 정도로 성업하기도 했다. 지금은 본점과 지점 1곳으로 줄어들긴 했지만 최대 매출을 올릴 때에는 연 70억 원 이상 실적을 올릴 정도였다.

/정성인 기자

“86년 아시안게임을 9월인가 했지 아마…. 그때 경상대학교 앞에서 개척서림이라고 인문사회과학 전문 서점으로 출발했어요.”

당시는 우리 사회 전반에 민주화 열기로 뜨거울 때였다. 대학가 앞에는 인문사회과학 전문 서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을 때였다. 운영하기도 만만치 않았을 듯.

“당시에야 심심하면 압수수색 당하고 걸핏하면 털리고…. 경찰서 불려 가서 조서 쓰는 게 일이었지요.”

왜 서점이었을까? 아무래도 신체장애가 영향을 미친 듯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다치고 나서 다리가 영 불편하다.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어요. 당시에는 책을 읽으려면 서점에 가야 했고, 자연스레 서점과 친해지게 됐지요. 아무래도 내가 육체적으로 결함이 있어 조직화된 사회에 들어가 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기에 익숙했던 서점을 운영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 경상대학교 앞에는 다행히도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없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곳에서 서점을 차렸다.

“80년대 대학가 서점은 그랬어요. 서점 주인이 손님에게 맡겨놓고 데모하러 나가기도 하고, 주인과 손님이 함께 데모하러 가기도 그랬지. 뭐랄까 자유 민주 뭐 이런 시대정신이 있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던 책도 그런 쪽이기도 했고…. 자연스레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차렸지요.”

지역내 젊은 문화를 주도하던 ‘책마을’

서점을 운영하던 그는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리고는 시내로 이전했다. ‘책마을’. 당시 마산에 ‘책사랑’이 있었고 전국에서 두 번째로 생겨난 출판문화공간이었다. 회원제로 책을 빌려주는 도서관 역할도 하고, 책을 판매하는 서점 역할도 했다. 아울러 문화행사도 하고 공연 기획도 하는, 책을 매개로 다양한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이었다.

/정성인 기자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서점 하면서 굉장히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책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가 확장됐고 어떤 공동선이 있었어요. 주인이나 고객이나 말 안 해도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죠. 그 공간이 주는 특이성 때문이었는지 행사를 마련하면 참여도도 굉장히 높았어요.”

전시회도 하고, 작가와의 만남 행사를 하거나 소식지를 발간하고 문화답사도 다니고 그랬다. 그런 서점 문화에 대한 생각, 책마을에서 시도했던 것 중 한두 가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서 한 번씩 고객들과 문화답사도 다니고 그런단다.

그러다가 91년 ‘진주문고’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서점업에 뛰어들게 된다. 일반 서점을 하면서도 ‘책과 삶’이라는 소식지를 내고 초청강연회를 열었으며 ‘책과 삶 문화기행’이라 해서 답사도 꾸준히 다녔다.

본점과 지점 3곳을 두던 황금기도 있어

“진주문고를 시작한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상업화의 길로 나섰다는 거죠. 앞의 두 개 서점과는 완전히 다른 거였어요. 세상에 나선 것인데,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기고 하면서 그렇게 가게 됐지만, 앞의 두 서점을 통해 맺어진 인간관계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 분으로부터는 큰 도움을 받았고 많은 사람이 당시 거금이었던 50만~100만 원정도 서점 쿠폰을 사주고 했다는 것. 그랬기에 시작할 때의 마음을 놓을 수 없었고 아무리 어려워도 하지 말고 가지 않아야 할 금기가 있었다고도 했다.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는데 덜컥 IMF가 오고 말았다. 국민 대부분이 힘겹게 살아가던 시기였으니 서점이라 해서 다를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여 대표는 서점의 존폐는 내 삶의 존폐라는 배수진을 치곤, 지금의 평거동으로 확장 이전을 감행한다. 1999년, 그렇게 두 번째 진주문고 시절을 맞이했다. 1개 층에서 시작해 2개 층으로 서점을 확장하고 지점 개설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가장 먼저 가좌동 MBC점에 이어 대형마트인 탑마트점, 갤러리아백화점 입점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5~6년 전이 최고 황금기였던 것 같아요. IMF를 겪으면서 굉장히 힘들어졌지만,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해 2008년 전후까지 매우 좋았어요. 하지만 그 이후로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중입니다.”

3곳에 이르렀던 지점은 1곳만 남았으며, 본점도 매장 운영이 어려워지자 1층 매장 일부를 잘라 약국과 아이스크림점으로 임대해야 했다. 어려운 시기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사실 매장을 축소하고 하면서 운영하는 조건은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 건물 일부를 임대하면서 억지로 유지하고 있는 셈이지요. 서점을 계속해야 하느냐는 갈림길에 서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나는 ‘내가 진주에서 처음으로 서점을 연 사람은 아니지만 끝까지 서점을 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소망이 있어요. 매일 내가 주문처럼 외우는 나에 대한 약속이죠. 마지막 서점인이 되고 싶은 거죠.”

‘마지막 서점인’이고픈 그에게 서점이란?

/정성인 기자

‘마지막 서점인’이라. 그에게 서점은 무엇일까?

“서점 하나가 지역민에게 던진 약속이랄까요. 영원한 서점 주인이고 어떤 책이라도 독자가 원한다면 구해주고 싶어 했던 약속이 있어요. 지난 10년 동안 1년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 공간이라는 점도 공간적 가치가 있죠. 책에 대한 열정과 그 공간적 가치에 대해 서점 주인인 나와 이용하는 시민 사이에 보이지 않지만 신뢰관계가 형성돼 있는 듯해요. 이를테면 약속 장소가 마땅치 않을 때 ‘거기서 기다려라’거나, 차비가 없거나 급하게 돈이 필요하면 ‘거기 가서 누구 이름 들먹이고 차비 빌려 와라’거나, 어두컴컴해 무서운데 누가 따라오거나 위험 느낄 때 ‘거기 들어가라’는 식이죠.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평등한 그런 ‘공간’에 대한 신뢰관계가 아닐까 싶네요.”

그는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의 구색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는다.

서점의 모든 것은 ‘책으로 시작해서 책으로 끝난다’는 기본적인 생각 때문이다.

“고객들은 온라인 서점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으로 책을 삽니다. 그 가격 차이를 이 공간의 유지비용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직도 공간을 이용해주는 분들이 있어 운영이 되는 거죠.”

지금의 대형 위주, 물량주의 아래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서점은 양적이든 질적이든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사회의 변하는 모습이 이 작은 공간에도 그대로 투영된단 말입니다. 책의 흐름에서부터 고객의 흐름, 운영하는 내 마음까지도 변하죠. 이대로 간다면 서점도 지금의 형태와는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종이책이 존재하는 한은 일정한 공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물량 위주의 대형 서점에서 다락방 같은 작은 공간이 되더라도 그 공간을 지키고 계속하겠다는 게 내 약속입니다.”

전국적으로 오래된 서점이 속속 문을 닫는 얘기에 이르러 언성이 높아졌다.

“통계로도 나와요. 86년도 진주에 60여 개 서점이 있었어요. 10년 전 전국 서점 3500여 개 됐고 진주도 35개 정도 됐는데 10년이 지나고 보니 진주도 반토막이 돼 이제 15개가 남았어요. 전국도 1700여 개로 줄었고요. 실질적으로 참고서나 문구점을 뺀 일반적으로 서점이라 부를 수 있는, 책을 어느 정도 구비한 서점은 진주에서 5개 남짓할 거예요. 나머진 학교 앞 참고서 서점이거나 문구점을 병행하는 동네서점 형태예요.”

서점이 없어지는 이유로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서점이 물량과 가격 공세를 취하는 것과 함께 영상세대의 성장을 꼽았다.

“출판사가 온라인 서점에는 오프라인 서점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책을 공급하고 있어요. 이를 바탕으로 온라인 서점들이 저가 물량공세를 펼 수 있고요. 다른 하나는 독서인구 자체가 많이 줄었어요. 영상세대가 주류로 편입되면서 거기에 익숙해 있던 친구들은 정말 책을 보지 않지요. 청소년이나 젊은 친구들은 필요한 모든 정보를 책에서보다는 온라인 인터넷이나 영상매체를 통해 찾는 데 익숙해 있지요. 독서인구 감소도 오프라인 서점을 없앤, 지금도 굉장히 힘들게 하는 요인이고요. 나는 그렇게 봐요.”

책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정부정책이 먼저

서점 얘기에서 자연스레 책 얘기로 넘어간다. 그에게 책은 무엇이었을까?

/정성인 기자

“책은 영혼과 물성을 함께 가진 물건인 것 같아요. 영혼으로 보자면 책에 영향을 받아 큰 인물이 됐다거나 그런 얘기 많잖아요. 그때 독자는 살아있는 책속 활자와 대화하는 것이죠. 물성으로 보자면 1년에 우리나라에서 새 책이 40만 권씩 쏟아져 나온단 말입니다. 한 달에 3만 권 이상, 하루 천 권 이상 쏟아진다는 것인데 이게 다 다르단 말입니다. 저자도 내용도 모양도 크기도 활자도 색깔도…. 각자의 물성을 갖고 독자 눈에 띄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다양한 상품이 쏟아지는 시장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면서 “나무에게 참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책의 원료는 펄프이고, 펄프는 나무를 베어 생산되기에 결국은 나무를 돌아보게 되더라는 것. 그런데 그에게 나무는 단순히 ‘책의 원료가 되는 나무’라는 것을 넘어선다.

/정성인 기자

“처음에는 책의 원료가 되는 나무라는 정도에 생각이 머물렀어요.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무 없는 책을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내 삶 자체가 나무를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말이면 부모님이 계신 하동에 가서 자고 오곤 하는데 어느 날 야산에 있는 굽은 소나무를 보게 됐고, 못생긴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것을 보게 된 겁니다. 어쩌면 내 인생의 대부분은 나무에 대한 빚이기도 합니다. 내가 마지막 서점인이 되겠다고 했으니 앞으로 더 많은 나무를 베어야 하는데도 나는 나무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중에 죽은 후 저 나무 한그루에게 거름이 된다면 한줌의 재라도 뿌려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지요.”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점이 됐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인터넷에 한 시간을 쓰고 나면 다시 인간의 고요한, 내가 잠 깼을 때 맑은, 또다시 뭔가를 세우기 위해 텅 빈 머리로 돌아오는 데는 10시간이 걸린다고. 그러니까 인터넷이나 영상에 취해있는 세대가 어떻게 책으로 돌아오느냐는 문제는 서점이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출판만의 문제가 아니고, 정부정책이나 사회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앞으로 굉장한 재앙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지 않는 청년들이 미래 한국사회의 성장동력을 어디서 찾을까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서점 운영 28년을 하고도 그는 “지금의 오프라인 공간을 대체할 더 좋은 업이 있다면 어떤 모험이라도 해 볼 용의는 있지만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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