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소 하청업체 그라인더공이로소이다

아들이 막걸리를 사 들고 왔다. 잔을 받았다. 한 잔 쭉 마시는데, 아들 표정이 달랐다.

그는 조선소 하청업체 그라인더공(工), 따로 직함이 없는 평범한 노동자다.

용접을 한 울퉁불퉁한 쇠 표면을 그라인더란 기계로 갈아, 매끈하게 깎아내는 것이 그의 일이다. 일본말 ‘사상공’으로도 불린다.

삼부자가 모두 노동자가 된 사연

아들 둘이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해보겠다고 했다. 한 아들은 군대 가기 전에, 다른 아들은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 일자리를 소개해줬다. 삼부자는 이렇게 조선소 하청업체 노동자가 됐다.

아들 둘은 건조 선박 기름과 관련 일을 했다. 기름을 뒤집어쓰고 땡볕 아래, 펄펄 끓는 지열 위에서 아이들은 일했다. 아들 작업복은 기름 때로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등과 가슴이 땀으로 절어 있었다. 불볕더위에 쇠판을 튕겨 나온 복사열과, 지열과, 그리고 안전을 위해 입은 두툼한 옷, 작업으로 인한 열이 아들의 몸을 데우고 있었다. 더위가 사람을 푹푹 삶고 있었다.

   

휑하니 아들을 볼 뿐, 그곳에선 그나 아들이나 하청업체 노동자일 뿐이었다.

아들을 보던 눈을 돌려 그는 그라인더를 들고 쇠를 깎았다. 현장은 불꽃이 튀고 소음이 터져 나오는 극한의 작업장이었다.

그라인더 작업은 조선소 현장에서 가장 위험한 작업 중 하나였다.

통상적인 작업복을 입고, 그 위에 공기를 통하게 하는 에어 재킷을
겹쳐 입는다. 우비 같은 보호복 한 겹을 껴입고 그 위에 다시 보호복을 한 겹 더 껴입어야 불꽃이 맨살을 파고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무거운 잠수부용 보호 헬멧 같은 것을 쓴다. 헬멧과 등에 공기를 공급하는 공기 호스가 달려 있다. 이 여름, 이 공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그는 1분 이내에 사망할 수도 있다.

삼부자가 일을 끝낸 첫날, 노동자의 아내는 아들과 남편을 위한 밥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아들이 다시 아버지의 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아버지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보여 사람이 하는 일로 보이지가 않더라고요.”

아버지는 아들을 보면서 안쓰러웠는데, 컸다고 아들 둘이 현장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아들이 알아주는 아버지의 삶이란….

짜아~한 기분과 함께 술잔이 따라지고…. 막걸리 한 잔이 일과의 피로와 가족을 위해 노동해온 그 긴 시간이 거짓말처럼 보상되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농사꾼이 되었지만…

그는 본디 농사꾼이었다. 경상대학교 원예학과를 나왔고 1991년 부시 전 미 대통령이 방한으로 쌀개방 압력이 거세질 때 농부가 되었다.

고향은 진주시 진성면이다. 땅을 임대했고 농사를 지었다. 이때 그
는 괜찮은 직책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전국농촌총각결혼대책위원회 경남지부장이었다. 1980년대 강기갑 전 의원이 주축이 돼 만든 이 단체는 경남에도 지부를 만들었다. 그는 이곳 지부장이었다.

말이 지부장이지, 결혼 못한 총각들만 있는 우글거리는 시골 총각 클럽 같은 곳이었다.

   

결혼은 그도 급했다. 단체는 있었지만 인연이 맺어지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1박 2일 총각 관련 행사가 있던 날, 당시 그는 자신이 회원으로 있던 진주청년문학회에 자신이 지부장으로 있는 이 단체 행사에 참가할, 아는 여성을 좀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오겠다던 여성은 당일 오지 않았다. 일이 다르게 진행되려 했는지 이 여성은 날짜를 잘못 알고 다음날 행사장에 참석했다. 이 여성은 농촌총각결혼대책위원회 경남지부장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그는 지부장의 이름으로 이 여성을 안내하고 접대했다.

이런저런 사연을 겪으며 농촌총각 경남지부는 3쌍 정도를 결혼시켰다. 결혼한 총각 중에는 그도 포함돼 있었다. 아내는 1박 2일 행사에 하루 늦게 온 여성, 장은옥(48) 씨였다.

전국농촌총각결혼대책위원회 경남지부는 표면적 목적이었던 결혼 성과는 크게 내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문을 닫았다.

“모인 총각들은 농촌이 뭐가 문제가 있는지, 왜 무역 개방 과정에서 농업이 희생되어야 하는지를 공부를 통해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농촌운동을 했던 것이다.”

농촌 현실을 담아 ‘고향편지’를 쓰다

이때쯤 그는 세상을 향해 편지 한 장을 쓴다. 기고 형식의 글이었다.

‘고향편지’란 제목으로, 지금은 휴간한 진주신문에 5회 정도 게재됐다. 농촌 현실을 편지로 전하기 위함이었다. 도시로 떠난 이들에게 농촌으로 돌아와 줄 것과 도시민의 삶을 위로 하고 싶었던 순진한 바람도 있었다. 편지를 받고 싶으면 주소를 알려달라는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고향 편지는, 받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나 전달됐다.

그러다 한 여성에게 연락이 왔다. 서울에 한 제약회사 노조위원장이었던 이 여성은 인근 식당에 노조사무실로 밥을 배달시켰다. 이때 밥상에 덮인 신문이 진주신문이었고 이 신문 속에서 ‘고향편지’를 읽었다. 이 노조위원장은 친구와 함께 그가 있던 편지 발신지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그의 편지는 마음을 흔드는 뭔가 있었다. 편지는 처음, 주로 전국 일간지 등에 독자 기고를 하는 사람들의 주소를 찾아내 보냈다. 이러던 것이 한 명 두 명씩 늘어났고 나중엔 2000부 이상으로 늘어났다. 편지는 전국으로 보내졌다. 답장은 매달 100부 이상 도착했다.

1개월 1번 썼던 편지는 분량 때문에 2개월에 한 번씩 보낼 때도 있었다. 원본 하나를 쓴 뒤 그 편지를 2명이 직접 손으로 썼다. 2000부를 모두 손으로 써서 보낸 거였다.

고향편지는 2년간 배달됐다. 평균 1개월에 500통 정도를 보냈다.

순전히 손으로만 썼기에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농촌 총각 둘이 한 달 내내 저녁만 되면 편지를 써야 했다. 고단하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매주 댓 통씩 돌아오는 답장이 자꾸만 글을 쓰게 했다.

가난했지만 넉넉했던 시골이 있었지 않았나’며 귀농을 권유하기도 했다. ‘UR 등으로 인한 농민 피해와 농촌 현실’ 등을 담기기도 했다.

   

그 남자에게는 3번째 편지 후, 답장이 왔다. 서울 구로공단에서 일을 한다는 그는 신문에 노동문제에 대해 기고를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남자는 답장했다.

“편지가 많은 위로를 줬다. 나는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다. 농촌에 들어가 잘 살아보겠다. 편지가 큰 힘이 됐다.”

그는 인삼으로 유명한 고향 충남 금산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금산에서 인삼 그늘막을 개발해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향편지는 2년 만에 끝났다. 우표 값이 갑자기 올랐던 게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농촌에서 수십만 원은 경제적 부담이 큰 일이었다. 2년을 꼬박 밤마다 손으로 베껴 쓰는 편지에 대한 시간과 육체노동 부담도 만만찮았다. 고향에서 도시로 보내던 그 위로와 안식은 이렇게 끝이 났다.

농약방 파산 후 고향을 떠나다

농약회사에 다니던 친구가 찾아와 그에게 ‘농약 가게’를 권했다. 농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다.

농사를 지으면서 좀 더 벌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농약방을 겸했다.

박보근 노동자./사진 허동정 기자

“나도 농사를 지을 때 무지막지하게 농약을 쳐댔다. 농약방을 하면서 그게 문제란 것을 알게 됐다.”

타 지역 농민 일이지만 그는 이런 일을 목격하기도 했다. 밀을 재배한 농민이 그의 가게에서 제초제(그라목손)를 사간 뒤 뿌렸다. 밀은 죽어버렸다. 밀이 늦게 익어 벼 심는 시기가 늦어지자 인위적으로 죽여 버렸던 것이다. 밀이 죽어 노랗게 변하자 농부는 콤바인으로 수확했고 그것을 팔았다. 또 다른 농부는 서리가 오기 전에 성장 촉진제를 써서 빨리 과일을 익게 하기도 했다.

농민 입장에서는 방법이 없는 경우라고 하지만 무분별한 농약 남용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명함에 담뱃갑 경고문을 패러디한 ‘지나친 농약은 사람과 농작물에 해로우며…’와 같은 경고문을 써 넣고 다녔다.

어쨌거나 농약방 장사는 잘됐다. 날씨에 따라 특정 작물 병이 생길 것 같으면 잔뜩 약을 사다 재어놓았다. 거짓말처럼 약은 팔려나갔다.

이러다 IMF를 맞았다. 농약을 공급하던 업체들이 외국계 회사로 팔리면서 원금 상환을 요구했던 것이다. 시골 농약방 경영이란 게 농약회사에서는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와 농민들에게는 외상 파는 구조였다. 농민 대부분은 추수 이후에 돈을 갚았기 때문에 제약 회사에 갚을 돈이 없었다. 받을 외상값만 7000만 원이 넘었다.

제약회사에는 돈을 주지 못하고 농민들에게는 돈을 받지 못하는 상황, 그는 잔뜩 빚만 진 채 야반도주하듯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일당 7만 원에 잡은 일자리, 그라인더공

처가 있었고 자식이 있었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거제도로 왔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생수 공급 사업을 해보려 했지만 엎친 데 덮쳐, 공급 업체가 부도났다. 쥐고 있던 돈마저 모조리 날려버려야 했다.

가진 돈은 겨우 10만 원이었다.

박보근 노동자./사진 허동정 기자

10만 원을 쥔 그날부터 그는 일주일간 공사현장 인부들을 관찰했다. 일주일 뒤 인력 용역업체를 찾아갔다.

삐쩍 마른 그의 몸을 보고 용역업체 사장이 물었다.

“아저씨 그 몸으로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똥장군 반장군 지고 오솔길을 날아다닌 몸이요.”

사장이 이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박보근 노동자./사진 허동정 기자

똥장군을 가득 채우면 무겁지만 지고 가긴 어렵지 않다. 반만 채운 똥장군, 즉 반장군이면 똥물이 한쪽으로 쏠려 대부분이 자빠져 똥을 뒤집어쓰게 돼 있다. 용역 사장이 반장군을 지고 나른다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였다.

그는 태어나 처음 5만 원짜리 일당 노동자로 공사 현장으로 들어갔다.

하루는 목수를 따라 목수 보조(일명 데모도)를 하는데, 목수가 대뜸 “야, 야!”라고 자기에게 손짓했다.

그는 위층으로 뛰어올라 목수에게 따졌다.

“뭐요. 처음 본 사람한테 야가 뭐야. 야가.”

목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아니라……. 말뚝같이 생긴, 쐐기 모릅니까. 그게 ‘야’라 카는 건데요.”

야는 쐐기의 일본말이었다.

또 하루는, 목수가 “창고 한쪽에 있는 ‘사개부리’ 좀 가져오소”라고 심부름시켰다.

사개부리가 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그는 일단 창고로 들어가 사개부리란 걸 찾기 시작했다.

눈에 띈 게 깨진 사기그릇이었다. 사기를 ‘사개’라고도 발음 했기에 짐작건대 사기 부스러기를 가져다주면 될 듯싶었다. 그는, 사기그릇을 깨어 잘게 부순 다음 목수에게 가져다줬다.

목수는 기막혀했다.

“참말로, 사개부리 몰라요! 노가다 하는 사람이…. 건물 위아래로 수직을 맞출 때 쓰는 실 끝에 달리 쇳덩이, 추가 사개부리라.”

절절 헤매던 시기가 그때였다.

5만 원 일당을 받고 5000원을 소개비로 뗄 때였다.

하루는 새벽에 일을 기다리는데 “사상일 해본 사람! 7만 원” 하기에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일당이 2만 원이 더 많지 않은가. 사상일이 뭔지도 몰랐다. 7만 원이란 돈 때문에 시작한 게 조선소 그라인더공이었다.

“나는 그라인더공입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직함이 없습니다. 나는 앞에 나서는 사람이 못됩니다. 하청업체 노동자로 나는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그라인더로 철판을 깎는 일이 좋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최근 그는 다른 방법이지만 다시 고향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박보근 노동자./사진 허동정 기자

‘품앗이꾼과 품팔이꾼’ ‘거름장군과 어덕서니’ ‘환경미화원 급여명세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 ‘세균역적(勢均力適)’ ‘고다이바가 살린 마을’…. 이런 제목으로, 그는 경남도민일보 ‘아침을 열며’ 코너에서 칼럼을 쓰고 있다.

읽어보시길…. 그의 글이 얼마나 따뜻한지….

그의 이름은 박보근(51)이다. 그는 장은옥 씨의 남편, 경현(21) 용현(20) 경산(10), 아들 셋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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