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부터 부산 광안대교 케이블에 매달린 채 80미터 상공에서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고공 농성을 벌였다. 일각에서는 그린피스 활동가들의 시위 방식을 놓고 위험천만하고 극단적인 방법이란 비판도 일었다. 몇 가닥 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 뙤약볕과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광안대교에 내건 대형 현수막에는 뭉크의 '절규' 캐릭터와 함께 '25㎞'라는 글자가 쓰여있다. 이는 광안대교가 부산 기장군 고리원자력발전소로부터 25㎞ 떨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방사능 피폭 지역은 반경 50㎞. 때문에 많은 국가는 비상계획구역으로 불리는 대피 구역을 폭넓게 지정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원전비상계획구역은 8~10㎞에 머물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전까지 한국과 동일한 비상계획구역을 설정했던 일본은 긴급보호조치계획 구역을 30㎞까지 확대했다. 한국의 긴급보호조치계획구역은 미국(80㎞), 헝가리(30㎞), 핀란드·벨기에(20㎞), 남아프리카공화국(16㎞)에 비해서도 좁게 설정되어있다. 10㎞의 긴급보호조치계획구역을 설정해두고 있는 프랑스도 필요에 따라 즉시 식품제한구역을 설정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유럽연합집행위원회는 긴급보호조치계획구역을 30㎞까지로 권고하고 있기도 하다. 그린피스 활동가들의 외침은 현재 한국의 원전 비상계획구역을 30㎞까지로 넓게 설정하자는 요구이다. 이쯤 되면 '원전을 없애자는 것도 아니고, 안전을 위한 건데 그냥 확대하면 안되나'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까닭에는 예산 문제가 걸려있다. 지난해 원전 관련 방재대책 예산으로 원자력안전위원회에 넘겨진 예산은 35억 원가량. 원전이 깨끗하고 값싼 에너지임을 국민에게 홍보하는 예산으로는 85억 원 남짓이 배정됐다. 수치상으로는 정부가 원전의 안전보다는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인식을 불러올 수도 있는 문제다. 넉넉하지 않은 예산이다 보니 방사능 침투를 막는 방호약품인 요오드화칼륨은 부산·울산 시민을 위해 19만 명 분이 마련되어 있다. 원전사고 영향권에 거주하는 지역민이 340여만 명인 점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넉넉한 수치라고 볼 수 없다. 벨기에는 20㎞내 전 주민에게 약국을 통해 방호약품을 사전배포하고 있다는 것이 그린피스 측의 설명이다.

후쿠시마 사고가 난 지 약 2주 후, 20㎞ 북쪽의 미나미소마(南相馬)시 시장이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식량과 연료의 지원을 애절하게 호소한 적이 있다.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자 선진국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생필품 부족 사태, 즉 안전신화가 가져온 허술한 방재대책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핵발전소로부터 약 5㎞ 떨어진 곳의 병원 입원환자 약 350명이 피난하는 과정에서 40명이나 사망했고, 또 정부의 늦은 피난 지시 때문에 30㎞ 지점의 주민이 약 1개월 동안 높은 방사능에 피폭되기도 했다. 심지어 60㎞ 떨어진 곳에서도 일반인 허용기준치의 20배에 달하는 방사능 오염이 측정되었다.

한편 현행 8~10㎞의 방재중점구역 범위는 일본이 1980년에 채택한 규정을 빌려 온 것이다. 심지어 시마네(島根) 핵발전소의 9㎞ 지점에 있는 도청 소재지를 편의상 방재중점구역에서 제외시키기 위해 예외적으로 설정한 8㎞ 규정까지 서슴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현행 10㎞의 경우에도 정부와 관련 지자체가 주변지역의 주민을 안전하게 피난시킬 방법과 장소 등을 실질적으로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핵발전소에 사고가 발생하면 사회적, 신체적으로 열악한 어린이와 노인들에게 피해가 집중된다. 게다가 환자나 장애인의 피난까지 고려하면 더욱 신중한 방재계획의 개선 및 강화가 절실하다. 방재계획은 반드시 실행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만약 방재계획이 물리적으로 어려울 경우에는 핵발전소의 건설 또는 가동을 허가해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는 방재중점구역에 포함된 해수욕장이 유사시 불특정 다수의 피서객을 무사히 피난시킬 방재계획 수립이 어렵다는 이유로, 거의 완성된 핵발전소 허가를 거부한 사례도 있다.

   

핵발전소 사고는 발생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사고 발생 시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사전에 철저한 사고방지뿐만 아니라 사고 후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정부 관계자들은 최소한의 국제적 기준이라도 충족할 수 있도록 현행 형식적인 방재계획의 개정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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