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왕의 화가들〉 (박정혜·황정연·윤진영·강민기 지음)

2010년 전북 전주시는 한옥마을에 있는 경기전(사적 339호) 안에 어진박물관을 개관했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화다. 그곳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보관돼 있는데, 1872년 고종 때 낡은 원본을 새로 그린 것으로 조선 왕의 유일한 전신상이다. 최근 보물 제931호였던 태조어진이 국보 제317호로 승격되기도 했다. 어진을 그린 화사(畵師)들은 당대 최고 화원들로 구성됐다던데,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

<조선시대 궁중회화 3: 왕의 화가들>은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을 조명한 책으로 1·2권은 <왕과 국가의 회화>, <조선 궁궐의 그림>이란 제목으로 발간됐다.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1897~1910)까지 왕실의 회화를 담당했던 이들의 삶, 역할, 예술 세계 등이 담겨 있다.

   

왕의 화가를 분류해보자면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도화서(圖畵署)라는 관청에 속했던 '화원(畵員)'과 왕을 직접 만나 왕의 초상을 그렸던 '어진화사', 조선 문예 최성기인 정조 대에 새롭게 마련됐던 '규장각 차비대령화원', 대한제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외교관·기술인·교육자 등 예술가로서 폭 넓게 활약한 '근대전환기 화가' 등이 있다.

화원은 궁중에서 일어난 일상과 모든 현상을 그림으로 남겼다. 왕족의 상주 공간을 치장하는 길상화, 행사 기록화, 벽화와 단청, 각종 지도와 지방지형도, 왕의 초상화 등 실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왕의 화가들>에는 화원이 어떤 대우를 받았고 어떻게 뽑혔으며, 인식과 대우는 어땠는지 자세히 나와 있다.

화원에게는 원칙적으로 다달이 화폐로 받는 개념의 월급은 없었다. 몇 개월 치 급료를 한꺼번에 현물로 받는 녹봉만 있었을 뿐이다. 재밌는 건, 녹봉의 양은 사계절마다 치는 시험 성적에 따라 좌우됐다는 것이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이(?) 실력을 갈고 닦아야 했고, 당연히 화원들 사이에선 피 터지는 경쟁이 펼쳐졌다.

조선시대 관료를 꿈꿨던 사람은 생원진사시, 문과, 무과 등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물론 도화서 화원도 일종의 국가 공채 시험인 '취재(取才)'를 통과해야 했다. <경국대전>의 '예전(禮典)' 조에 실린 도화서 취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원이 되고자 하는 자는 매년 사계절의 마지막 달인 3월, 6월, 9월, 12월에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시험 과목은 대나무, 산수, 인물, 영모(翎毛), 화초 중에서 두 가지다. 대나무를 1등으로 쳤다.

'익종어진'은 6·25 전쟁 이후 보관 장소 화재로 불에 탔다. 왼편으로 불길이 번지는 도중에 건져내 오른쪽 상단에 붙여놓은 표제는 손상되지 않았다.

조선 후기부터 시행된 '차비대령화원'이 되려면 도화서의 5가지 화목을 기본으로 산수·인물·영모·매죽·초충·속화·문방·누각 등 8가지 화목을 통과해야 했다. 차비대령화원은 '임시로 뽑아내 임금의 명령을 기다리는 화원'을 뜻하는데, 당대 최고수 화원이라 보면 된다. 흔히 알려진 김홍도와 초상화를 잘 그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이명기는 단번에 차비대령화원 시험에 합격했을까. 그렇지 않았다니, 진짜 어렵긴 어려웠나 보다.

왕의 초상화를 보면 '저 그림을 혼자서 어떻게 그렸을까' 고생깨나 했겠다 싶은데, 재능에 따라 왕의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主觀畵師), 의복과 신체를 그리는 동참화사(同參畵師), 배경을 담당하는 수종화사(隨從畵師)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철저히 역할 분담을 통해 '털끝 하나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라는 말처럼 매우 사실적인 초상화를 만들었다.

아쉬운 점은 이런 당대 최고 화가들의 작품인 어진이 현재 5점밖에 없다는 것. 창덕궁 신선원전에 보관됐던 어진 46본이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화재로 대부분 손실됐다. 화마 속에 남은 어진은 '태조어진', '영조어진', '철종어진', '순조어진', '익종어진' 등이다.

왕실 화업의 핵심을 이뤘던 도화서가 갑오개혁(1894년) 이후에 폐지되면서 화원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들은 국가의 공적 활동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수요에 응해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그 가운데는 황실과 권력층의 최측근에 있으면서, 국가적 위기상황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화가도 있다.

'서직수초상'으로 이명기와 김홍도가 함께 그린 작품이다.

화원은 아무리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 하더라도 문인화가보다 신분이 낮았고, 관직이 높아 봐야 종 6품의 하급 기술직에 그치는 등 사회적으로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몇몇 화가는 매우 특별한 경우다. 궁중회화 뒤에 숨겨졌던 조선 최고의 예술가, 화원의 삶과 예술세계가 궁금하다면 〈왕의 화가들〉을 추천한다. 그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407쪽, 돌베개, 3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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