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노래·연주·녹음·음향 필요하다면 다 가야죠"

‘페이비 추천-이 사람이 궁금하다’ 시리즈 네 번째다. 지금까지 김경년 창동통합상가상인회 간사, 김윤미 경남사회적경제지원센터 사무국장, 연극인 천영훈 씨에 대해 들여다봤다. 네 번째 인물 인터뷰를 위해 ‘페이스북 창원시그룹’에 추천 부탁 글을 올렸다. 한동안 반응이 없어 진땀을 찔끔 흘릴 찰나, ‘박영운’이라는 이름이 올라왔다. 이번뿐만 아니라, 앞서 7·8·9월에도 추천 댓글에 종종 거론됐던 이름이다. 창원시 용호동에 있는 박영운 씨 음악 작업실로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고교 시절부터 클래식 악기 두루 섭렵

‘박영운(46)’이라는 이름 앞에는 여러 수식어가 달린다. 가수·연주가·녹음 엔지니어·음향 엔지니어…. 여기에다 창원민예총 가수분과위원장까지 맡고 있다. 그래도 ‘가수 박영운’이 가장 입에 붙는다.

그는 대중성보다는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 공연하려 노력한다.

박영운 / 사진 김구연 기자

“노래·연주를 사회운동 차원으로 했습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통해 사회운동을 하는 것과 같죠. 노래에는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요.”

그는 ‘위안부 문제 조속해결 촉구 결의대회’가 있던 자리에서는 가수 이미자가 부른 ‘여자의 일생’을 팬 플루트로 연주해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음악인생 출발은 클래식분야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20대 중반까지 클래식 악기 이것저것 두루 다뤘다. 그런데 그게 좀 우연찮은 부분도 많다.

“고등학교 때 클라리넷을 잠시 하고 나서는 플루트를 본격적으로 배웠죠.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어머니 목걸이를 팔아 33만 원 주고 플루트를 샀어요. 그런데 집에 도둑이 드는 바람에 다시 마련해야 했죠.”

눈앞이 캄캄했지만, 스스로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 내 낚싯대 만드는 곳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돈을 모았다.

하지만 플루트 살 돈은 못 됐다. 그래서 가격이 좀 덜한 팬 플루트에 눈 돌렸다. 당시 팬 플루투는 국내에 들어온 지 4~5년 정도밖에 안 돼 생소했지만, 스스로 연주법을 익혀갔다.

그러다 스무 살 넘어 군악대에 들어갔다.

“‘하라면 해야 하는 곳’이 군대이기에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트럼펫을 또 하게 됐죠. 군대 갔다 와서는 술가게 하는 지인이 “술값 대신 맡겨둬서는 찾아가지 않는다”며 줘서 트럼본을 만질 기회도 있었어요.”

마창지역 노래패 ‘소리새벽’을 만나다

박영운 / 사진 김구연 기자

클래식 악기를 두루 섭렵한 그에게 1989년 23살, 전환점이 찾아왔다. 당시 마창지역 대표 노래패였던 ‘소리새벽’을 알게 된 것이다.

“소리새벽은 후배를 통해 알게 됐는데, 그 노랫말에 반해 들어가게 됐습니다. 애초는 연주 쪽이었지만, 노래 파트 남자가 두 명밖에 없을 정도로 부족해 자연스레 그쪽 파트가 된 거죠. 그렇게 1999년 저 혼자 남아 해체될 때까지 10여 년 소리새벽 활동을 했죠.”

소리새벽은 해체됐지만, 노래에 대한 욕심은 더 커졌다. 업소 라이브 무대로 뛰어들었다. 물론 금전적인 문제 해결도 있었지만, 훈련을 위한 목적이 더 컸다. 7년간 라이브 업소 무대에 서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새로운 일을 도모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가수 20명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어요. ‘다른 사람 노래를 손님들 입맛에 맞게 장사하는 것 말고, 자기 노래하고 싶은 사람만 모여라’는 내용이었죠. 그렇게 17명이 모여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다운 노래로 아름다운 세상을’이라는 팀을 만들었습니다. 2년 정도 활동했는데, 개개인 문제와 음악적 색깔이 맞지 않은 부분이 겹쳐 음반까지는 내지 못했죠.”

그다음으로는 지역가수인 이경민 씨와 함께 ‘그린비’라는 이름으로 4년 정도 활동했다. 이 역시 음반 발매 일주일을 남겨놓고 팀을 해체했다. 그는 노래에 담긴 메시지와 노래하는 사람의 삶이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부분이 부족했다고 판단해 음반 발매도 포기한 것이다.

박영운 / 사진 김구연 기자

도종환 시인 노랫말 담은 생애 첫 앨범 준비

그는 무대 위에서 직접 노래 부르고 연주하는 일 외에도 음악 엔지니어로서도 바쁜 활동을 하고 있다. 그 밖에 음반제작, 음향·영상 설계시공, 음향장비 렌탈 같은 일도 병행하고 있다.

그 아지트는 창원시 용호동에 있는 녹음스튜디오다. 몇 달 준비한 공연이 음향 문제로 망친 경험을 여러 번 했다. 그래서 스스로 이쪽 분야까지 손 뻗친 것이다. 지역에서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10년 전 빚을 내서 간단한 음향기기 정도 사들여 시작했다. 낮에는 주부노래교실에 강의 나가고, 저녁에는 업소 라이브무대에 서고…. 하루 2시간만 자며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고가 장비들을 하나둘 마련해 구색을 갖췄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가수들은 꿈을 쫓기는 하지만, 생활에 대한 어려움이 큰 편이다. 학원 레슨·개인 강의 같은 것으로 생계에 도움 얻기도 한다.

박영운 씨는 녹음스튜디오를 통해 음반작업, 선거 로고송 제작 등으로 생활에 도움 얻고 있다. 4년 전에는 스튜디오에 불이 나 홀라당 태워 먹는 바람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지금은 통장에 잔고가 없어 그렇지, 그래도 빚은 없다. 가정이 있기는 하지만, 이곳 스튜디오는 그의 숙식 장소이기도 하다.

그는 이제 생애 첫 개인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노랫말은 도종환 시집 〈담쟁이〉에서 가져왔다. 〈담쟁이〉는 도종환 시인이 스스로 가장 아끼는 50편을 엄선한 시집이다. 한 도의원 추천으로 읽어 보았는데, 글이 매우 좋았다. 도종환 선생으로부터 노랫말 사용 허락을 받았고, 곡은 클래식 작곡하는 후배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듯하다. 다른 이들 녹음작업·공연준비를 도와주느라 좀처럼 틈이 나지 않는 것이다. 9월에는 ‘노동자와 함께하는 경남민족예술인대회’ 등 여러 무대에서 음악감독을 맡아 밤잠을 설쳤다.

그래도 올해 안에는 반드시 앨범을 내겠다는 계획이다.

목 관리할 틈 없는 가수

박영운 / 사진 김구연 기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에는 지난해 8월부터 활동했다. 짧은 기간 많은 이를 알게 돼 인간관계에 큰 도움이 됐다. 요즘도 페이비 가운데 스튜디오를 찾는 이들이 많다. 작업이 좀 나태해지는 측면도 있지만, 그래도 늘 반갑다.

음반 발매 작업을 앞두고 목 관리에 신경 써야 할 법도 한데 “아예 안 합니다”라고 말한다. 술도 매일 하고, 담배도 끊어보려다 오히려 하루 두 갑으로 늘기만 했다. 이런저런 작업으로 밤새는 일도 많으니 목 관리는 애당초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군다나 이 말을 들어보면 더욱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떤 자리에는 가수로 가기도 하지만, 또 어떤 자리는 연주자·엔지니어로 가기도 합니다. 노래가 필요해서 노래했고, 연주가 필요해서 연주했고. 공연 전달을 잘하기 위해 음향 엔지니어를 한 것입니다. 저는 제 역할이 ‘가수다’ ‘연주가다’ 이렇게 어느 한 쪽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부분에 내가 도움 될 수 있고, 또 각 분야에서 더 좋은 사람이 나올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거면 된 거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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