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12) 임해진에서 개비리를 걷다물가 벼랑 옛 개비리길, 길 확장하며 흔적 사라져 안타까워

 

'낙동강을 품는다'에 실을 자료 조사를 위해 임해진으로 향하는 길에 틀어 놓은 라디오 뉴스에서는 4대강 사업이 예정 목표를 웃도는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옵니다. 우리나라 토목 건설 수준이야 익히 아는 바이지만 대관절 얼마나 속도전을 치렀기에 그런 성과가 나왔을지 저로서는 의아합니다. 마치 지난 국회에서 4대강사업 관련 예산을 날치기 통과시키던 그 북새통과 묘하게 닮은 모습인지라 누군가는 이 보도를 들으면서 가슴 떨려 했겠지만, 치가 떨리는 이들도 적잖았을 겁니다.

 

◇노리 점촌 개비리길 = 오늘은 임해진에서 노리로 이어지는 개비리길을 걷습니다. 지금은 물가 벼랑에 열렸던 호젓한 개비리길은 사라졌지만 <한국지명총람>에는 노리 점촌(店村) 동쪽에 '개비(犬碑)'로 불리는 '노리개로비'가 있다고 나옵니다. 비석이 있는 곳을 '개비-걸'이라 하는데, 이것은 개비가 있는 길이란 말이니 개비리길에 대한 지명적 증거인 셈입니다.

노리 점촌 개비걸의 개비와 안내문. /최헌섭

임해진에서 점촌에 이르는 구간이 낙동강의 침식에 의한 바위 비탈임을 감안하면, 비리길이 아니면 통행할 수 없기 때문에 비탈을 깎아 비리길을 내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옛 비리길은 1987년 6월 보병 제39사단 공병단이 2km 구간의 옛 길을 확장하면서 없어졌습니다. 주민 편의를 위해 좋은 뜻으로 한 일이지만 옛길의 흔적이 사라져 안타깝습니다. 길가 모퉁이에 세운 기념비에는 청암리와 학포리를 잇는 길이라 두 마을 머릿자를 따서 청학로(靑鶴路)라 했다고 적었는데, 저로서는 개비리라는 이름이 더 정겨워 보입니다.

임해진에서 노리로 이르는 이 비리길 아래에는 높이가 30자나 되는 상사바위가 있어 옛 이야기 한 토막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옛날 이 마을에 결혼을 약속한 남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남자가 죽어버렸대요. 그 뒤 죽은 남자가 정혼한 여인을 잊지 못해 뱀이 되어 찾아와 잠자는 처녀의 목을 감고 있는 것을 처녀의 부모가 보고 이 바위에 데려와 원혼을 달래 주었더니 감았던 목을 풀어주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사람들이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상사바위를 지나 노리 점촌 마을 개비걸에 이르면, 지금도 길가 무덤 앞에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무덤에 딸린 비석으로 여겨 예사로 지나쳐 보기 십상입니다. 비석은 머리를 둥글게 깎은 비갈(碑碣) 모양인데, 풍화가 심해 비문을 알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앞면에는 이 길을 낼 때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겼고, 달리 비석의 이름이나 길을 낸 내력을 적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무술년 4월에 세웠다고 적었으나 그 시기는 알기 어렵고, 형태로 보아 조선시대에 세운 것은 분명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올해 이 비석과 무덤에 보호 철책을 두르고 안내문을 세웠습니다.

◇노리 점촌 개비걸의 개비와 안내문 = 안내문에 적기를 "옛날 임해진과 노리 부락에 성(姓)이 다른 두 마리의 개들이 살고 있었다. 두 마리의 개들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로 정을 잊지 못해 임해진에서 노리부락으로 매일같이 험한 산길을 오고가며 정을 달랬다. 그러기를 여러 번 왕래하고 보니 그 험하고 험한 산에 길이 생기고 말았다. 이 길이 있기 전에는 노리와 임해진을 오고가는 길이 없어 한없이 고생을 했는데 이들 개에 의해 산길이 만들어져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 주었다. 개들이 뜻 없이 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개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비를 세웠는데 이를 개비라 전해져 오고 있다. 이곳 비석을 탁본하였으나 노후하여 글자를 식별할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으며 이후 이곳을 개비(견비 : 犬碑) 또는 개로비(開路碑)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라 했습니다. 안내문에 성(姓)은 성(性)을 그리 적은 듯하며, 개로비의 열 개(開)는 물가를 뜻하는 개 포(浦)의 훈을 적기 위해 개의 소리를 빌려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이 비석은 전해지는 바처럼 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개비리(견천; 犬遷)를 개설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봄이 옳을 듯싶습니다.

◇노리 점촌 가마터 = 개비리길을 따라 산모퉁이를 돌면 개비가 세워져 있는 가마골 점촌(店村)에 듭니다. 점촌은 독을 짓던 독점(옹기점; 甕器店)이 있었기에 생성된 지명인데, 대개 이런 지명을 가진 곳은 가마터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점촌을 달리 가마골이라고도 합니다. 이곳 독점은 광명단이 사용되기 이전인 1960년대까지도 조업을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낙동강 수운을 이용해 옹기를 유통하기에 유리한 입지적 장점이 이곳에 독점을 열게 한 배경이 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약간 상류의 청암리 점촌의 분청사기 가마터와 하류인 본포의 독점도 이 같은 입지 배경이 공통으로 간취되기 때문입니다. 독 굽던 가마는 마을 앞으로 열린 도로가 개설되면서 없어졌고, 지금 이곳 점촌(가마골)에는 펜션이 들어서 있습니다.

◇주경석(周敬奭) 시혜불망비 = 점촌을 지나 노리(魯里)를 향해 길을 잡으면, 달리 논실이라고도 불리는 노리 남서쪽 들머리에 주경석 시혜불망비가 있습니다. 옛 비는 마멸되어 잘 보이지 않아 1962년 청명절에 새 빗돌을 만들어 지금 자리로 옮겨 세운 것입니다. 이 비는 흉년에 사재를 내어 마을 사람들을 구휼한 은혜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전합니다.

한편, <한국지명총람>에는 점촌 동쪽에 주영석선심비(周永奭善心碑)가 있다고 채록해 두었으나 찾을 수 없습니다. 비석을 지나면 안쪽에 낙동강을 바라보고 그림처럼 자리 잡은 동네가 바로 노리입니다. 풍광이 아름다운 마을이었는데, 지금 마을 앞 경작지는 낙동강에서 퍼 올린 준설토를 쌓는 야적장으로 변해 그 좋던 모습을 다 망쳐 놓았습니다.

◇학포리 = 노리에서 낙동강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면 학포리(鶴浦里)에 듭니다. 마을 이름이 학포(鶴浦)인 것은 낙동강 북쪽 물가 마을이라 그리 불리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학(鶴)이 북쪽을 이르는 달 또는 다라를 적기 위해 두루미라고도 불리는 학을 훈차하고, 포(浦)는 물가 또는 하구(河口)나 나루를 이르기도 하는 개를 훈차한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학포저수지 동남쪽 들 가운데에는 말을 묻었다는 '말무덤-거리'가 있고, 마을 안쪽에 들면 독곡사당(獨谷祠堂)이 있습니다.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진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을 모신 사당으로 약 150년 전에 다시 세운 것이라 전합니다. 성석린은 글씨와 문장이 좋아 당시 세상에서 소중히 여겼다는데, 그래서 시호가 문경(文景)인가 봅니다. 마을 앞 들에는 '하린대(활인대; 活人臺)-걸'이란 지명이 남았는데, <한국지명총람>에는 예전에 큰 소나무가 몇 그루 있어서 홍수 때 사람을 살렸기에 그리 부른다고 합니다. 합천 밤마리(율지 : 栗旨)의 활인대가 돈대를 쌓아 사람을 구한 것과 비슷한 예입니다. 그런데, 실제 주민에게 물어서 알기로는 이곳 하린대-걸에도 100평정도 흙으로 쌓은 토대(土臺)가 있었다고 하며, 지명을 보더라도 토대가 있었다는 주민의 말에 믿음이 갑니다. 마을 동쪽의 낮은 구릉은 예전에 당제를 올렸던 '당산-등'인데, 이곳에는 청동기시대의 민패토기가 흩어져 있습니다. 이로 보아 이곳 당산등에는 북쪽 구산리(九山里)에 분포하는 지석묘에 묻힌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헤아려집니다.

올 한해 낙동강 문화 탐사에 동행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다가오는 토끼해에는 별주부전의 토끼처럼 슬기롭고, 문경 토끼비리 전설처럼 힘든 인생길 잘 헤쳐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헌섭(역사연구공간 두류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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