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9) 옛 매포나루터를 지나 길곡에 들다

오늘은 안개가 자욱한 강변도로를 따라 길곡쪽으로 길을 잡아 나섭니다. 머지 않은 옛적에 민물회가 성했던 우강리를 지나 오호리로 접어드니 4대강 사업 낙동강 18공구 현장사무실이 안갯속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짙은 안개에도 아랑곳 않고 사업장을 드나드는 덤프 행렬이 그야말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인 좁은 도로를 무서운 기세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매포진(買浦津) = 강변 마을인 이곳 오호리는 영산쪽 매포진(買浦津)이 있던 곳으로 맞은쪽의 칠원 매포(買浦)와 오갔던 나루입니다. <경상도지리지>에는 이 곳이 영산의 조세를 배에 싣는 곳이라 했고, 조세를 모아 운송하던 기능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상류의 쇠나리(송진: 松津)로 넘어갔습니다. <경상도속찬지리지> 영산현 도진에는 '현의 남쪽 매포진에는 항상 배를 둔다'고 나옵니다. 또한 이 책 원우에는 '현 남쪽 도의천리(都衣泉里)에 매포원(買浦院)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원은 매포에 있었기에 그런 이름을 얻었을 터이니 이곳의 옛 이름이 도의천리라는 것도 일러 주고 있는 셈이지요.

<동국여지승람> 영산현 산천과 <여지도서> 경상도 대구진관 영산현 산천에는 매포는 '현의 남쪽 23리에 있다. 혹은 멸포(蔑浦)라고 하며, 칠원 우질포의 하류다'라고 했습니다. <해동지도>에는 매포진과 멸포진이란 이름으로 나오며, 나룻배가 있다고 적었습니다. <대동여지도>에는 밀진(密津)이라 적어 칠원현 매포 맞은쪽에 그렸으며, 이곳에 옛 고을(고현:古縣)이 있었다고 표시했습니다. 그 고현은 바로 죽산(竹山)이라 불리기도 한 옛 밀성군(密城郡)의 영현이었던 밀진현(密津縣)을 이르며, 신라 경덕왕 때 그렇게 이름을 고쳤습니다.

함안보 공사가 시작되기 전 매포진 일대 모습. /최헌섭 대표
25일 오후 낙동강 함안보 공사현장에서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

이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 고적에 이르기를 '권근(權近)의 사략(史略) 신라 지리에는 추포(推浦)의 주에 밀진이라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영산의 남쪽 30리 되는 곳에 멸포가 있고, 밀(추: 推)과 멸(蔑), 밀(密)이 사투리 소리로 같으므로 이것이 그 땅인 듯하며, 더욱이 고려 때에 영산 계성이 모두 밀양의 영현이었으니, 이 땅이 밀양에 붙었던 것은 분명하나 상고할 길이 없다'고 하였지만, 그리 보면 대체로 맞게 상고한 듯합니다.

◇오호리(五湖里) = 밀포진이 있던 오호리의 옛 이름이 오가이향이 있던 곳이라 오가리라 불리다가 1914년에 내동과 외동을 합쳐 오호리라 했습니다. 바로 <동국여지승람> 영산현 고적에 오가이향(烏加伊鄕)이 매포 동쪽에 있다고 한 게 그 기원인 게지요. 이렇게 고쳐진 마을의 이름으로 보건대 이곳에는 낙동강의 영력으로 만들어진 배후습지성 호소(湖沼)가 여럿 있었음직해 보입니다. 1980년대 초에 발행한 지형도를 보면, '앞늪'과 '생갱이늪' 등 두 늪이 있었는데 지금은 매몰하여 논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오호리란 이름이 비롯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곳 오호리 일원의 수리가 안정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취락 경관이 그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난리가 걱정되던 시절에 들어선 집들은 구릉을 의지하여 앉아 있고, 수리가 안정된 뒤에 새로 지은 집들은 구릉 아래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마을이 신기(新基) 또는 신촌(新村)인 것은 터를 잡은 지가 그리 오래지 않았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곡강신선생순절유허비(曲江辛先生殉節遺墟碑) = 오호리 새터 마을에는 곡강신선생순절유허비가 있는데, 이것은 고려 전공판서 신사천과 그의 두 딸이 왜구에 저항하다 순절한 것을 기리기 위해 경상도체찰사 전법판서 조준(趙浚)의 상소로 세운 삼강정려비(三綱旌閭碑)의 하나입니다.

이곳에 있는 비석은 그를 주벽(主壁)으로 모신 도천서원이 1869년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그가 순절한 이곳 멸포에 단을 두고 청명일에 제를 올려 오다가 고종 27년(1890)에 이 빗돌을 세운 것입니다.

두 딸의 절의를 기려 세운 정려비는 태종 5년(1405)에 건립되었으나, 일제 관헌에게 비각이 방화 소실되어 도천 안산 뒤 골짜기에 옮겨 세웠는데, 다시 넘어져 그 자리에 묻었다고 합니다.

유허비가 있는 오호리 새터마을을 지나 길곡으로 이르는 산모퉁이를 따라 돌면, 바로 이곳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함안보가 건설 중입니다.

함안 칠북면 영포리 매포마을과 오호리 신촌마을 사이의 낙동강에 보를 막아 수자원을 확보하기 위함이라는데,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가 적으니 문제입니다. 바로 이곳은 전통시대에 함안과 영산을 오가던 나룻배가 운영되던 곳으로 강의 양쪽 기슭에는 매포 또는 밀포·멸포로 불리던 나루터가 있었지요. 그것은 이곳이 강의 너비가 가장 좁고 위에서부터의 물 흐름을 막아 주는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는 구릉이 강 쪽으로 튀어나와 있기 때문이지요. 예전에는 같은 이름의 나루터를 양쪽에 두고 막힘없이 통하던 곳에 댐으로 볼 수밖에 없는 보를 막고 있으니 오히려 옛사람에게 소통의 의미를 배워야 할 지경입니다.

◇경덕서당(景德書堂) = 오호리 신촌에서 비리길이 있었음직한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길곡 증산리 하내마을이 나옵니다. 이곳은 벽진 이씨의 세거지인데, 마을 안에는 한강 정구 선생의 문도인 외재 이후경(1558~1630년)과 관련되는 경덕서당이 있습니다. 외재는 이곳 하내마을 벽진 이씨의 입향조가 되는 인물로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까지 가서 왕을 모셨다고 전해집니다. 그 공으로 음성현감을 지냈고, 죽어 영산 덕봉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이곳에는 그의 저술인 외재집과 아들의 문집인 익암집 책판(외재집부익암집책판; 畏齋集附益庵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2호, 1998년 11월 13일 지정)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서당의 동쪽 기슭에는 고려시대의 질그릇과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어서 외재가 이곳에 세거지를 마련하기 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헌섭 역사연구공간 두류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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