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8) 창나리에서 남지 피수대까지

오늘은 남강이 낙동강에 드는 용산리의 창나리(창날)에서 걸음을 시작합니다. 옛 사람들은 남강과 낙동강이 합쳐지는 이곳을 기음강(岐音江)이라 했다지요.

<경상도지리지>(1425년)에서 그 이름이 비롯함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책 계성현(桂城縣) 대천(大川)에 "낙동강이 현 서쪽을 흘러 지나가는데, 의령에서 오는 대천과 합류하는 곳이 기음강이다"고 했고, "수령이 가서 제사 지내는 곳이 한 곳 있는데, 기음강의 가야진명소지신(伽倻津冥所之神)으로서 현에서 28리 50보를 가야 한다"고 전합니다. 또한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 의령 공세 수납에는 "세를 바치려고 현 동쪽 기음강에서 배에 싣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곳 용산리에 있었다는 창나리(창진 倉津)는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에서 비롯한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나리의 옛 이름은 기강진(岐江津)인데, 기강에 있던 나루라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기강은 앞서 본 기음강의 줄임말로서 옛 사람들은 남강이 낙동강에 드는 것을 예서 갈래진 것으로 보아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름에서 보듯 이곳은 이질적인 환경이 접촉하는 생태적소(生態適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적 특성이 실질적으로는 수상교통의 요충으로 기능하게 되고, 나아가 신령스런 제의의 장으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낙동강은 창나리(사진 앞쪽)에서 남강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고려시대 이래로 나라에서 국태민안을 비는 제를 올려 왔던 것입니다. <고려사> 지 제11 지리2 영산현에 "……온천이 있고, 또한 가야진명소(伽倻津冥所)가 있다"고 나옵니다. 조선에 이르러서는 세종 11년(1429) 11월 11일에 예조에서 전국의 영험한 곳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국가에서 행하는 치제의 예에 따를 것을 건의할 때, 이곳 영산현 경내 계성의 기음강용당(岐音江龍堂)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는 가까운 양산의 적석용당(赤石龍堂)과 전라도 광주의 병로지용당(幷老只龍堂)과 더불어 전국의 세 용당 중 하나일 만치 중시된 곳이었습니다. 이곳 용당에서의 제의는 <세종실록> 지리지 영산현에 "기음강은 현 서쪽 28리 거리에 있다. 용당이 있는데, 춘추로 수령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되, 축문에 가야진명소지신이라고 칭한다"고 나옵니다. 바로 이 용당이 바로 앞서 본 <고려사>에 나오는 가야진명소인 게지요.

<동국여지승람> 영산현 산천에 "기음강은 현의 서쪽 28리에 있다. 창녕현 감물창진 하류인데, 의령현 정암진(鼎岩津)과 합쳤으니, 옛날에는 가야진(伽倻津)이라 일컬었다"고 했습니다. <여지도서> 산천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하며, 이 책 단묘에는 기음강용단(岐音江龍壇)은 사전(祀典)에 가야진명소라 하며 봄가을로 본 읍에서 제를 올린다고 나옵니다. <대동지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하는데, 이 책 영산 단묘에 "기강용단(岐江龍壇)은 고려 사전에 가야진명소라 불렀으며 소사(小祀)를 올렸다. 지금은 읍에서 춘추로 제를 지낸다"고 전합니다. <해동지도>에는 "창녕 감물창진의 하류로서 의령 정암진과 합쳐지는 곳이며, 옛날에는 가야탄(加倻灘)이라 했다"고 실었고, 나루의 위치는 남강과의 합류점에 그렸으며, 사선(私船)이 있다고 전합니다.

이렇듯 이곳 기음강 일대는 고려시대에는 가야진명소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기음강용당 또는 기음강용단으로 불리면서 나라에서 국태민안을 빌던 역사적 제의(祭儀)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 용산리 창나리에서 낙동강으로 물이 드는 곳 - 바로 남강 하구의 맞은편- 에 대해서는 이런 제의 장소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는 그런 조사를 예고하는 어떤 안내문도 게시되어 있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또한 기강진, 가야진, 가야탄, 창나리로 불리던 수상교통의 요충지로 기능해 왔습니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최근의 한국전쟁 때에는 전란의 격랑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낙동강살리기사업 구간의 19공구와 47공구에 포함되어 오랫동안 국태민안을 빌어 왔고, 국난의 위기마다 나라를 건진 구국의 현장이 이런 몹쓸 사업으로 인멸될 지경에 처했다니 가슴이 저립니다.

남강이 낙동강에 드는 용산리를 지나 남지읍을 향해 내려오면, 낙동강의 범람에 대비하기 위해 강가에 쌓았던 피수대(避水臺)가 있던 곳을 지납니다. 이름 그대로 피수대는 홍수 때 수해를 피하기 위해 쌓은 대로서, 1939년 5월 1일에 착공하여 이듬해에 완성한 인공 제방입니다. 처음 마련한 피수대는 남지읍 본동 동쪽 굴강과 국도 5호선이 만나는 본동 입구에서 서쪽으로 남포동과 상남동까지 쌓았다고 합니다. <남지읍향토지>에는 당시에 쌓은 길이가 1808m(다른 자료는 모두 1108m라 전함)였는데, 상대포에서 용산리까지 연장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그마저 남지제 축조공사로 2001년부터 헐어지기 시작해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지역 신문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그 해 2월 19일에 145m가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남은 높이는 2.3m에 이르고, 그 위의 너비는 10~18.6m에 이르는 인공대지였다고 전합니다.

이곳 남지의 피수대는 합천군 청덕면 율지리의 활인대(活人臺)와 같은 기능을 가진 일종의 돈대(墩臺:평지보다 높직하게 만들었지만 평평한 땅)라 할 수 있습니다. 활인대란 이름으로 미루어 보자니 돈대를 쌓아 사람을 살렸던 기억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돈대는 창녕 부곡면 학포리의 '하린댓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널리 보자면, 이런 돈대는 한강 하류의 미사리에도 있고, 함안군 가야에는 돈대 구실을 하는 돈산(墩山)이라는 작은 구릉이 있습니다. 그러니 함안 가야도 수리가 안정되기 이전에는 홍수 때마다 물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인 게지요. 그래서 가야 앞들의 이름이 '한바다'인데, 얼마나 물이 들었으면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싶습니다. 또 김해시 진례면 송정리 들 가운데에도 돈담마을이 있는데 아마 이와 비슷한 예일 것입니다.

/최헌섭(역사연구공간 두류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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