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재직 중인 회사에서 몇 년 전에 인사담당 부서장의 직무를 수행했던 적이 있다. 장차 회사의 장래를 책임질 유능하고 창의적이며 도전적인 인재를 선발하려고 채용절차를 재검토하고 정교화하고자 고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채용공고에 이은 서류심사, 적성검사, 1차 실무면접, 2차 실무면접, 영어인터뷰, 3차 경영진 면접 등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 채용되는 직원들은 대개 그 채용과정의 경쟁률이 높을수록 그리고 그 절차가 엄격하고 체계적일수록 입사에 대한 만족도도 커지게 마련이다.

큰 그늘 남긴 IMF 외환위기

그런데 이런 복잡하고 엄격한 선발과정에 합격하여 당연히 입사할 것으로 기대했던 지원자가 최종 입사 확정단계에서 입사를 포기한 적이 있어서 당황했던 적이 있다. 그 지원자는 비교적 좋은 학교 성적에 단정한 외모와 겸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와 논리적인 사고력까지 갖추고 있어서 최종 면접에서도 꽤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인사담당 부서장인 나로서는 그가 입사를 포기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연유는 이랬다.

그 지원자는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금융회사와 다국적 컨설팅업체 그리고 사업경력이 오래된 금융공기업 등 몇몇 기업에 복수로 응시하여 동시에 합격한 것이었다. 나는 그가 합격한 몇몇 기업의 이름을 들으면서 '아 그러면 그 회사를 선택했겠구나'하고 다국적 컨설팅 업체를 떠올렸는데 그의 최종 선택은 나의 예상과는 달리 사업경력이 오래되고 보수적인 금융공기업이었다.

하지만, 그가 왜 그 기업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듣고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의 부친이 IMF 당시에 명예퇴직을 하셨고,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는 그 일로 꽤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IMF의 아픈 상처가 젊은이들의 영혼에서 야망과 도전정신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서베이리서치센터가 실시한 '2007 한국종합사회조사(KGSS)'의 결과는 IMF의 그늘이 얼마나 깊숙하게 우리의 의식 속에 드리워져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일에 대한 만족도'와 '일에 대한 흥미'는 같은 조사를 한 국제사회조사연합(ISSP)과 동아시아 사회조사연합(EASS) 회원국 32개국 중 꼴찌라고 하니 당연히 삶의 질이나 행복지수가 높을 리가 없다.

기대수준과 현실과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더는 미래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고 체념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의욕의 감소로 나타나고 더 심하면 집단적인 무기력증에 사회가 함몰될 수도 있다.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일본의 복합불황 속에서 정부가 세금감면이나 보조금 지급 등 소비를 진작시키고자 다양한 정책을 내놓아도 소비가 점점 위축되었던 현상과 유사하다.

불황 속에서 당장 쓸 가처분소득이 없어서 소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소비를 할 여유가 충분히 있음에도 미래가 불안하니 손에 든 걸 놓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절대선(Flagship)은 '경제 살리기'이다. 그리고 '경제 살리기'의 동력을 공공부문 개혁에서 찾는 듯하다. 공공부문의 개혁과 규제의 과감한 철폐를 통한 체질의 개선은 장기적으로는 경제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구성원 자존심 살리는 노력을

하지만, 우리가 이미 IMF에서 경험했듯이 개혁을 통한 구조의 변화는 그 구성원의 심리적인 피로감을 가중시키고,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문제는 이러한 부작용을 치유하고 경감시키는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근로의욕의 저하와 같은 더 큰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외형적인 정책이나 시스템을 개선하는 작업은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를 다루는 작업은 훨씬 난해하고 또 시간도 많이 걸리고 성공을 낙관할 수도 없다.

IMF의 경험은 우리에게 외연적인 규제의 혁파와 체질의 개선만큼이나 그 구성원의 심리와 자존심을 손상하지 않는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노력의 시작은 믿음을 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개혁이 칼끝이 겨냥하는 곳은 불합리한 규제와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라는 믿음. 결코, 사람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믿음 말이다.

/안재봉(한국신용평가정보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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