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자와 남은 자의 땅, 거제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 거림 마을에서 차는 잠시 호흡을 멈춘다. 거림 마을에서 2.7km라는 선명한 표지판에 새겨진 단어는 ‘폐왕성’. 지난 10일 835년 전 무신의 난으로 폐위된 고려 폐왕 의종이 머물던 곳인 폐왕성을 찾아 그 첫 걸음을 뗐다.

2003년 잊힌 역사는 드라마 한 편을 통해 사람들 앞으로 불러 세워졌다. KBS 사극 <무인시대>가 한창일 무렵 거제극단 예도 최태황 대표는 “이 폐왕성을 중심에 두고 거제에도 거제사람 얘기 담은 연극 한 편 해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지난해 초부터 희곡 창작에 들어간 극단 예도가 오는 11월 드디어 연극 <폐왕성>을 무대에 올린다.

   
800년전 의종 머무른 곳…스러진 돌 무더기만


2.7km를 기꺼이 동행한 이들은 극단 예도 최태황 대표, 작품 연출을 맡은 심봉석 연출가, 의종 역을 맡은 이삼우씨, 무비 역을 맡은 구길화씨 등 4명.

거림마을에서 올려다본 폐왕성은 한 눈에도 거제의 군사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거제, 고려 의종이 폐위돼 유배된 곳, 고려와 조선 시대 모두 유배지였으며 한국현대사에서도 포로 수용소가 있었던 유배된 자들이 머무는 곳. 역사 속 거제는 항상 다시 떠나야할 곳, 혹은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곳인 유배지로 인식된다.

농업용수로 사용된 듯한 못과 계단식 논을 지나 산 중턱을 넘어서자 억새풀과 아카시아, 강아지풀, 간간이 보이는 밤나무와 소나무가 바람에 휩쓸려 초가을 스산함을 건넨다.

폐왕성은 토성이 아닌 돌로 쌓아올린 성이다. 그런데 이 곳에는 조금이라도 큰 바위는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아랫마을부터 산으로 돌을 옮겨 쌓은 것이다. 최 대표는 “거제에는 40여 개의 토성과 외성이 쌓여있을 만큼 왜구침입이 잦았죠. 의종도 처음에는 거제로 와서 거제읍이나 거림마을에서 살다 자객과 왜구의 위협 때문에 성을 쌓아 이 곳으로 옮겨 온 것 같아요”라며 폐왕성의 기원을 설명한다.

▲ 800여년 전 돌을 쌓아 만든 폐왕성은 무신의 난으로 폐위된 후 거제로 온 고려 의종과 그를 버리고 떠난 무비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극단 예도, 11월 연극 <폐왕성>서 과거 되살려


폐왕성터에 다다랐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쌓은 지 50년도 돼 보이지 않는 돌로 쌓은 성이 눈앞을 장식한다. 거제시에서 이곳 일부를 복원한 것이란다. 복원, 역사의 흔적을 다시 되돌려놓으려 하지만 상상력은 심하게 훼손된 듯하다.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진다. 낮은 구릉처럼 펼쳐진 폐왕성터의 위쪽은 그래도 이끼와 최소 800년은 훌쩍 넘은 돌들이 성터임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곳곳에 고려청자로 보이는 자기·그릇에다 기와조각이 흩뿌려져 있다.

성터 정상에 이르자 의종이 기우제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탑 뒤로 거제와 통영 내해가 한 눈에 펼쳐진다. 당시 배편 밖에 없었을 때 거제로 누가 무엇을 위해 오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

의종이 폐위되어 왔을 때 건넜던, 무비가 의종을 버리고 도망갈 때 이용했을, 그리고 그가 복위를 위해 다시 계림으로 향했을 때 건넜을 전하도목이 보인다. 그곳은 거제와 통영간 뱃길이 가장 짧은 곳으로 지금도 마을이름을 그렇게 유지하고 있다. 한산대첩 때 일본군 전선이 숨어있던 견내량과 한산도 앞바다가 펼쳐진다.

심 연출가는 구길화씨에게 “이곳에서 무비는 아마 육지를 향해, 송도를 향하려는 마음으로 하루에도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을 거야”라고 말한다. 구씨는 돌 하나하나를 만져가며 당시 무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담아보려 한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고향이란 메시지 전할 것”

사람은 아무리 오지라도 물이 있으면 삶의 터전으로 개척한다. 성터 중간 무비와 의종, 그리고 성을 지키는 호위무사들이 마셨을 우물터가 연못처럼 되어있다. 그 앞으로 의종이 살았을 집의 담장으로 보이는 돌담이 스러져 있고.

폐왕성터는 835년 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 심 연출가의 말처럼 83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것은 바람 뿐. 황량한 마음이 산 아래로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3~4마리의 까마귀가 폐왕성 창공을 스산하게 가르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이 아쉬웠던지 심 연출가는 다소 장황하게 말을 건넨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와 대우조선해양에서 일하는 이들과 그 가족을 합치면 어림잡아 10만여 명입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거제를 생존을 위한 유배지로 생각합니다. 연극 <폐왕성>은 떠나려는 자와 남아서 이곳 거제에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자가 마치 835년 전 무비가 의종을 떠나는 모습으로 비유됩니다. 그래서 이젠 내가 있는 곳이 바로 고향이란 말을 하고 싶어요. 거제를 떠나기 싫어했을 의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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