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은 왕비·동쪽은 세자 음양·사계 따른 공간배치
양의 방향 남쪽에 왕 침전…음의 방향에 중전

약간의 공백이 있었다. 지난 회 이야기가 끝난 곳에서 시작해 보자. 우리는 왕의 통치에 필요한 공간을 살펴보았다. 이곳을 만들기 위해 3개의 문과 3개의 영역을 구성했다. 광화문을 시작으로 흥례문, 근정문을 배치하고, 근정전을 만들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청와대 본관이다. 그 뒤로 집무를 위한 사정전, 생활공간인 강령전과 교태전이 있다. 상당히 넓은 공간을 빠듯하게 돌아본 듯 하지만 이 공간은 현재 남아 있는 경복궁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아마 경복궁 전체를 구석구석 이야기하자면 두꺼운 책 몇 권이 나와야 할 상황일 것이다. 우리의 여정은 그래서 이곳을 다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우선 살펴보는 방향으로 가고자 한다.

경복궁의 물리적인 중심은 생활공간인 침전 인근이다. 그중 왕을 중심(남쪽)에 두고 북쪽에는 왕비와 궁녀들의 공간, 서쪽에는 왕의 어머니인 대비의 공간, 그리고 동쪽은 세자의 공간을 배치했다. 북쪽에 왕비의 공간을 배치한 이유는 남쪽은 양이고 북쪽은 음이기 때문이다. 양은 왕의 방향이고 왕비는 음의 방향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비는 중요하지만 인생의 정점에서 물러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4계절 중 가을에 해당하는 서쪽방향에 두는 게 원칙이었다. 동쪽은 해가 뜨고 만물이 소생하는 희망찬 미래를 상징하는 방향이다. 그래서 이곳은 예외 없이 세자의 공간이 자리 잡게 된다. 동쪽의 주인인 세자를 동궁(東宮)이라고 부른 이유이기도 하다.

▲ 흥선대원군이 신정왕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면서 만든 자경전 뒤뜰 굴뚝(보물 제810호)이다. 마치 병풍처럼 십장생도를 펼쳐놓았고 그 주변을 다양한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놓았다. /문화재청

◇궁궐의 또 다른 남자-세자의 공간

간단히 세자라고 했지만 사실 궁궐 안에서 살 수 있는 정상적인 성인남자는 단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왕이고 다른 한 명은 왕이 될 사람, 세자이다. 나머지 왕족 남자들은 세자가 존재하는 한 자신들의 행동을 극단적으로 조심해야 했다.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왕조시대 반정들은 신하들만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하늘의 뜻을 받았다고 내세울 명분이 필요했고 대부분 그 명분을 왕족에서 찾았다. 본인이 전혀 반정에 참여한 적이 없더라도 그들의 입에서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는 죽어야 했다. 심지어 반정에 이용될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었다. 그래서 세자로 책봉되지 못한 왕족은 항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야 했고 반대로 세자로 책봉된 존재는 나라를 이끌어 가야했기에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세자를 위한 공간은 정작 조선왕조 건립(1392) 이후 세종 9년(1427)에야 만들어졌다. 이유를 따져보면 태조와 정종, 태종은 고려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었으니 이런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태어난 첫 임금은 세종이었다. 하지만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별도로 시스템을 만들지 않고 본인이 상왕으로 물러나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자를 교육했다. 세자를 육성하기 위한 체계적인 제도는 세종이 처음 만들었다. 세종은 근정전의 동쪽에 공간을 만들고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을 세우면서 세자를 위한 교육 체계를 만들었다. 선을 바탕으로(慈善) 선왕의 덕을 크게 계승하고 드러내라(丕顯)는 당부를 담고 있다.

지금 경복궁에서 만날 수 있는 자선당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자선당은 일제 강점기에 통째로 일본인이 뜯어가 사설박물관으로 사용하다 관동대지진 때 불에 타버리고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1995년 경복궁으로 다시 가져왔다. 목조건물은 콘크리트 건물과 달리 부재를 분해해서 옮길 수 있다. 하지만 불에 타면서 당연히 상부 건물은 없어졌고 주춧돌도 강도가 약해져 다시 활용할 수 없어 덩그러니 겨우 기초의 모습만 갖춰 놓은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조선 후기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는 건천궁 한 편에 쓸쓸하게 남아 있어 애잔함을 더하고 있다.

▲ 보물 제 809호인 자경전의 담장. 붉은 색 벽돌을 중심으로 한 담장 곳곳에 각종 길상, 문자 등을 새겨 장식했다. /문화재청

◇왕의 어머니 대비의 공간

왕비는 북쪽에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왕과 같이 생활했다. 그래서 그냥 궁궐의 가운데 있는 건물의 주인, 중전(中殿)마마가 된다. 별도 공간이 필요한 여성은 대비였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어머니는 한 분일 테니 이 넓은 궁궐 안에서 공간을 마련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실은 조금 다르다. 왕비는 비워둘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갑자기 죽었을 경우 새 왕비를 모셔야 했고 대부분 왕보다 어린 여자를 모시게 된다. 그래도 이 경우는 한 명의 대비만 있게 되지만 세자가 먼저 죽었을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남은 왕비는 당연히 후왕이 모셔야 할 대상이다. 게다가 여성들의 평균수명은 남성들보다 길다. 이런 복잡한 상황이 겹치게 되면 왕이 여러 명의 대비를 모셔야 할 경우도 많았고, 그 분들이 50년 넘게 대비로 있기도 했다.

성종의 예를 살펴보자. 세조, 예종, 성종으로 이어지는 왕계에서 성종은 할머니인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한 번에 모셔야 했다. 소혜왕후는 어머니고, 안순왕후는 작은어머니였다. 작은어머니가 계셨던 이유는 세조의 적장자이자 성종의 아버지는 의경세자였는데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어서 둘째아들이 예종이 되었고 예종의 비가 안순왕후였기 때문이다. 경복궁도 만든 지 100년이 지난 상황이라 한 번에 세분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별도의 대책이 필요했고 성종은 그 답을 창경궁을 만들어 해결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붙어 있는 궁궐이다. 원래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살아 있는 전임 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사용한 곳이었다.

태종이 죽은 후 특별한 용도가 없던 이곳을 성종이 대비들을 위해 창경궁으로 개편했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창덕궁과 창경궁은 명확하게 경계를 구분하지 않은 채 하나의 궁궐처럼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후대에도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는 낙선재, 석복헌 등 왕실 여성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가 보자. 원칙적으로 대비의 공간은 서쪽에 둔다고 했지만 경복궁에서 대비의 공간인 자경전은 북동쪽에 왕의 공간과 가깝게 있다. 그 건물도 왕비의 교태전을 넘어서는 수준을 보이고 있다. 칸 수도 많고 교태전에는 없는 누각(청연루)까지 있다. 그리고 자경전 전체를 각종 문양이 아름답게 수놓아진 담장이 감싸고 있고 뒷마당에는 십장생이 수놓아진 굴뚝까지 만들어져 있다. 이 굴뚝이 자경전과는 별도로 보물로 등재될 정도로 아름답다. 아주 이례적이다.

이런 자경전이 만들어진 이유는 경복궁을 중건한 대원군의 입장을 보면 이해가 간다. 당시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해서 일종의 권력 공백기가 있었다. 이때 후계자를 결정할 수 있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은 신정왕후였고 흥선대원군은 철종이 죽기 전 이미 신정왕후와 교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교감이 성공해서 아들은 고종이 되고 자신은 왕의 생부인 대원군이 되었다. 그래서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대비를 위한 공간에 많은 공을 들였을 것이다. 자경전은 자친(慈·어머니)이 경사(慶)를 누리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고종은 왕위계승서열에서 후순위에 있었기 때문에 궁궐 내에 거주할 수 없는 남자였고 세자로 책봉된 후에 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왕이 어릴 적 살던 곳은 궁(宮)으로 격상된다. 그래서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의 저택이 운현궁이 되었고, 강화도의 용흥궁도 같은 이유, 강화도령 철종이 어릴 적 살던 곳이어서 궁이 되었다.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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