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보살, 억압받던 불교가 살아남은 이유
절 대부분 지장전·명부전에 모셔
지팡이·보주 들고 머리 깎은 모습
죽은 뒤 '명부'서 인간의 변호사
영화서도 망자 지키는 임무 다해
지옥 이미지 강조하며 불교 전파

불상 이야기는 이번 회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마치 닥쳐온 시험에 쫓겨 급하게 수업 진도를 뽑는 선생님의 입장처럼 죄송스러운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20회의 제한된 지면을 생각하면 처음 이야기한 대로 다양한 문화유산을 다루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에 방향을 수정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란다.

그래도 잠시 남아 있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짚어보자. 지난 시간에 다룬 미륵 이후 우리나라 불교계는 삼국통일과 함께 원효·의상 등이 등장하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세상이 열린다. 여러 부처 중에서도 아미타불·관세음보살을 주로 모셨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함께 중·소규모 금동불에서 여러분이 많이 볼 수 있는 대형 석불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현상은 화엄종의 발달과 더불어 진행되었고 당시 고승들은 화엄세상을 열기 위해 화엄사·부석사 등 유서깊은 사찰을 만들었다.

미술사적으로 보면 이 시기가 불상의 전성시대이다. 아마 한 시대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예술적 역량의 총합이 있다면 삼국이 통일되던 무렵은 그 대부분을 불상에 쏟아부었던 시기이다. 우리는 그 절정을 석굴암 본존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예술적 역량은 불화로 옮겨갔다. 복잡한 불교 교리를 담기에 조각은 한계를 드러냈고 방대한 추상의 시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멋지게 돌을 다듬던 실력은 고려시대 부도나 부도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절을 지배하는 지장보살?

사실 지장보살은 예술적인 기준에서 보면 그다지 매력적인 아이템이 아니다. 뛰어난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일종의 민화에 가깝다. 하지만 석가모니가 없는 절은 있어도 지장보살이 없는 절은 없다. 교종사원·선종사원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절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있다. 이런 현상은 조선시대 들어서 확립되었다. 불교가 가장 배척받던 시기에 살아남은 힘이 지장보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자.

지장보살은 석가모니가 입적하고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내려오기 전까지 고통받는 중생들의 제도를 맡은 보살이다. 원래 고대 인도에서 대지와 자궁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모신이 불교로 수용된 존재이다. 그래서 대지(지·地)와 같이 무수한 선근을 담고 있다(장·藏)는 의미가 있다. 이런 지장보살은 지팡이(석장·錫杖)와 보주를 들고 두건을 쓰거나 머리를 깎은 승려의 모습을 하고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사진 1).

▲ 사진 1 - 지장보살도(고려후기),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고려불화대전, 2010, 국립중앙박물관 도 59. 민머리에 오른손으로 석장을 잡고, 왼손에는 보주가 있다. 이 불화는 보존상태가 좋아 법의에 화려한 금니가 특징적이다.

그러면 지장보살은 절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첫 회에 다룬 것처럼 일반적으로 지장전을 찾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지장전이 모든 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경우는 명부전을 찾으면 된다. 둘 다 지장보살이 있지만 지장전과 명부전(冥府殿)의 차이가 오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실마리이다.

명부전은 명부와 관련된 건물이라는 것이고, 명부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어두운(명·冥) 암흑의 세계(부·府)', 쉽게 말해서 지옥이다. 그래서 우리가 상가에 가면 돌아가신 분이 명계에서 복을 누리시길 비는 것이다(명복·冥福). 명부의 중심은 지장보살과 시왕(十王)이다. 시왕은 지옥에서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열 명의 판관이다. 각각 담당하는 인간의 죄악이 있고 죽은 뒤 7일마다 일곱 번씩 49일간 재판한다. 나머지 세 명은 죽은 후 100일, 1년, 3년이 지난 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지장보살은 명부에서 죄지은 인간들을 옹호하는 변호사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이 두 존재가 결합하여 명부신앙이 성립하게 되었다. (사진 2)

▲ 사진 2 - 경남 고성군 옥천사 명부전. 가운데 지장보살이 있고 양쪽 벽 의자에 앉은 관료의 모습으로 시왕이 표현돼 있다. 명부전이라는 이름이 말하듯 불교가 생각하는 사후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억불 시대의 돌파구 : 명부전

조선시대가 되면서 불교의 상황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사회의 지배 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완전히 교체되었고 승려나 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할 수 있었다. 절은 살길을 찾아야 했고, 그 중심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가 있었다.

유교의 중요한 의례는 관혼상제이다. 유교는 사후세계를 생각하지 않는다. 죽은 후 영혼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 부모님에 대한 효도의 연장으로서 제례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열심히 제사를 드리라고 해봐야 일반인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절차가 복잡해서 양반들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왕실에서도 1년상을 치러야 하는지 3년상을 치러야 하는지 당대의 브레인들이 목숨 걸고 싸웠겠는가?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상대적으로 쉽게 풀었다. 사람들이 죽으면 영혼들이 가는 세상이 있고, 거기에서 죽은 자들은 또 다른 상황을 겪는다는 설정을 한 것이다. 이건 만물은 윤회한다는 세계관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그러고 나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돌봐야 할 의무가 생겼다. 그러면서 기존 49재에 더해 유교의 1년상·3년상 등에 맞춘 시왕의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지장보살도 애초에 지옥을 담당하는 보살이 아니었다. 관음과 더불어 극락세계로 가는 것을 도와주는 존재였는데 시왕과 경쟁하며 인간을 돌봐주는 역할을 새로 부여받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여기에다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한 가지 장치를 더 고안했다. 아주 무시무시한 지옥의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명부전 외벽에는 사람을 끓는 물에 삶고(사진 3-1), 혀를 뽑아 쟁기로 가는(사진 3-2) 등 무시무시한 모습을 나타낸 그림들이 가득하다. 일종의 협박이다. 이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단지 일곱 명의 판관을 보여준 <신과 함께>를 봐도 알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시왕들의 판결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을까?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지장보살 즉 불교에 매달리란 말을 간접적이지만 강력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후 지장보살은 지장전이 아니라 명부전으로 들어간 것이다.

▲ 사진 3-1 - 화엄사 시왕도의 확탕지옥. 펄펄 끓는 무쇠솥에 사람을 던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지옥도(빛깔있는 책들 119), 1992, 대원사 p.45.
▲ 사진 3-2 - 흥천사 시왕도의 발설지옥. 죄인을 매달고 혀를 길게 뽑아낸 다음 소가 끄는 쟁기로 갈고 있다. 혀로 짓는 죄를 징벌하는 중이다. /지옥도(빛깔있는 책들 119), 1992, 대원사 p.47.

당시의 양상을 증언하는 조선왕조실록 세종 22년 1월의 기록이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지금 승도들이 서울 바깥 사찰에서 시왕도(十王圖)라 칭하고서 …(중략)… 그 잔인하고 참혹한 형상을 눈뜨고 차마 볼 수 없사옵니다. 진실로 그 도를 터득한 자는 반드시 이러한 짓을 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간사한 승도들이 생업을 영위하고자 불설을 가탁하여 이 그림을 만들어 절간에 걸어두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을러메서 많은 재물을 긁어모을 것이오니…"

사실 이런 상황은 불교적 세계관과도 맞지 않는다. 다시 <신과 함께>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 사람이 죽으니 저승사자가 찾아가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명계로 데려간다. 그리고 명계에는 시왕이 기다리고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왜 모든 사람이 지옥으로 직행하는 것일까?

초기 불교학파의 교학에 따르면 사람들이 죽으면 예외적으로 나쁜 사람들은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지만 보통사람들은 중유에서 다음 생을 기다린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지옥문을 통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불교의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한다 해도,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지장보살을 모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업을 쌓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아는 것이 힘이다. 겁먹지 말고 당당하게 인생을 살자! /최형균(LH 총무고객처) talktalk@lh.or.kr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