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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칼럼]청동기시대 진주 남강문화

당대 최고 기술 보유한 교역중심지 평가
추가 발굴로 과학기술 역사 재정립해야

오세현 전 경남과학고 교장 webmaster@idomin.com 2018년 10월 19일 금요일

1990년대 말, 남강댐 확장공사로 남강과 그 지류인 경호강, 덕천강 유역의 25개 지구에서 대규모 선사시대 유적 발굴이 이뤄졌다. 그중 11개 지구가 진주시 대평리 옥방·어은지구에 집중돼 있었다. 현재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근처의 수몰지역이다.

이곳에서 400동이 넘는 대규모 집터가 발굴됐다. 방어시설인 환호까지 갖춘 것으로 보아 남강수계 최대의 교역중심도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집터는 생활동과 작업동이 별도로 구분돼 있었고, 석기·옥기·토기공방 등으로 집단화되고 전문화돼 있었다. 1만 평이 넘는 농장유적에서 쌀, 보리, 밀, 조, 콩, 들깨 등을 재배했단다. 또,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 석제 목가공용 공구가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목기공방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역동적이고 화려했던 과학기술문화의 일단을 살펴보자. 먼저, 벼농사 기술이다. 대평에서 탄화미는 물론 볏과식물의 규산체가 발견됐고 바닥면에 등겨와 나락 자국이 찍힌 토기도 나왔다. 논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한반도 남부 대평의 도작기술이 규슈지방으로 전파됐다는 사실은 일본 학계의 정설인 것 같다.

또, 적색마연토기, 즉, 홍도(紅陶)가 단연 눈에 띈다. 홍도는 기존의 토기에 비해 두께가 매우 얇고, 가볍고, 튼튼하고, 화려하다. 그런 만큼 특수한 태토를 만드는 기술에 뛰어난 성형기술과 산화철 코팅기술은 물론 고온의 소성기술까지 당대 최고의 기술들이 융합된 히트상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덤의 부장용은 물론 생활도구로도 널리 쓰인 홍도는 남강을 통해 경남·부산지역과 일본에도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곡옥과 관옥을 비롯한 다양한 옥 제품들은 하이테크의 상징이다. 옥은 최고의 권력자나 그 주변인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위세품이었다. 대평과 그 인근의 본촌리와 묵곡리에서 발견된 옥 공방은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공옥(攻玉)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옥을 가공하기 위한 숫돌과 연마제, 구멍을 뚫는 활비비의 추는 물론 석영제 드릴 날까지 대량으로 발견됐다. 이런 작업 환경이라면 벽옥제 관옥도 얼마든지 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청동기시대, 진주 남강유역에는 선진과학기술력을 가진 산업공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 뛰어난 기술력과 히트상품들은 국내외로 퍼져 나갔다. 앞서 언급한 벼농사 외에도 '일본의 지석묘는 다른 문화요소와 함께 한반도 남강유역에 기원한다', '벽옥제 관옥은 한반도 남부에서 유래한 장신구다'라고 밝힌 일본의 여러 논문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런데 그렇게 융성했던 도시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오랫동안 인적이 끊겨버린 대평리 한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수수께끼를 우주선(宇宙線·cosmic ray)과 기후변동론으로 규명해 보려는 한 일본 고고학자의 연구는 매우 흥미롭다.

이곳 선사유적 발굴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최무장 전 건국대박물관장은 "진주 남강유역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뚜렷한 하나의 문화구역으로서 남강문화 또는 대평문화라고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고 했다. 필자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성과는 남강수계의 극히 일부 수몰지역에서 얻어진 것이다. 아직도 찾지 못한 퍼즐 조각이 많다. 따라서 추가적인 발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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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국내외 과학문화를 선도했던 남강유역 선인들의 과학기술의 역사를 정립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남강문화'의 실체를 밝혀 '진주 남강문화'를 꽃피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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