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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본 경남 50장면] (3) 빼앗긴 산하  

빈털털이로 내몰린 나라 잃은 설움

임종금 기자 lim1498@idomin.com 입력 : 2018-01-03 13:14:56 수     노출 : 2018-01-03 13:32:00 수

기어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다

의병전쟁을 토벌한 일본은 마지막 단계인 대한제국 병합 작업을 시작했다. 1909년 4월 일본은 내부적으로 '한국병합의 건'을 일왕에게 재가받았다. 일본과 친일세력은 기회를 엿보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이를 기회로 삼았다. 매국 단체 일진회는 1909년 12월 4일 통감에게 '한일합방청원서'를 올렸다. 이때부터 대한제국은 한일병합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에 들어간다. 예상과 달리 이완용와 가까운 대한협회는 병합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는 논공행상에서 일진회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견제행위에 불과했다. 결국 대한협회도 서서히 친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병합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일본은 1910년 6월, 내각 내 '강경파'인 데라우치를 제3대 한국 통감으로 임명했다. 1910년 6월 데라우치는 일본에서 일방적으로 대한제국 경찰권을 박탈하고, 7월 23일 입국했다.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신속하게 한일병합 작업을 끝내는 것이었다.

1910년 8월 4일, 이완용 총리대신은 비서 이인직을 통해 데라우치에게 병합을 건의했다. 데라우치는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든다"며 환영했다. 이완용이 움직이자 병합 작업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8월 중순, 이완용은 합병에 반대하는 인사를 통감부에 알리고 대책을 세웠다. 특히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병합 반대파인 학부대신 이용직을 일본 수해 위문 사절단으로 보냈으나, 이용직은 이완용의 속셈을 간파했다. 그는 와병을 핑계로 일본으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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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뺏긴 농민들 가운데 일부는 집을 잃고 토막집에서 살기도 했다.

1910년 8월 15일, 일본의 강요로 이재면(고종의 친형)을 흥친왕으로 봉했다. 합일병합 때 친일성향 황실 대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10년 8월 16일, 데라우치는 한일병합조약안 초안을 이완용과 조중응(농상공부대신)에게 보여주고 협의토록 했고, 같은 달 18일 내각회의에서 조약 내용과 절차가 결정됐다.

1910년 8월 20일을 전후해 일본은 전국에 흩어진 군대를 한성으로 집결시켰다. 이때 경찰권은 일본에게 있었기 때문에 치안유지도 일본 마음대로였다. 2명 이상 모이면 무조건 체포했고, 한성에는 평균 30m 당 군인 1명씩 배치될 정도로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그리고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은 병합 반대파인 이용직에는 알리지 않고 어전회의 개최안을 순종에게 요구했다. 순종은 "대세가 이미 정해진 이상 속히 실행하는 것이 좋다"며 이날 오후 1시에 어전회의 개최 칙명을 내렸다. 오후 1시, 칙명에 따라 내각 대신(이용직 제외)과 황실 대표 이재면이 모여 순종을 기다렸다. 오후 2시가 조금 지나서 순종이 회의장에 등장했다. 순종은 통치권 이양을 선언하고 조약체결 전권위원으로 이완용을 임명한다는 안에 옥새를 찍었다. 전권위원이 된 이완용은 데라우치가 기다리는 통감관저에 '뛰어서' 갔다. 오후 4시 일본국 전권위원 데라우치가 한일병합조약안에 서명함으로써 대한제국 국권은 빼앗겼다. 그러나 민중의 반발과 8월 27일이 순종 황제 즉위일이라 바로 발표하지는 못하고, 일주일이 지난 8월 29일 조약을 공포했다.

1910년 8월 23일, 일제는 토지조사위원회 설립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한반도 토지 수탈을 위한 기반이 됐다. 8월 26일이 되어서 기자들에게 조약안이 통과됐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8월 28일 조약안 전문이 언론사에 전송됐다. 그리고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안이 공표됐다. 경복궁에 일장기가 내걸렸고, 대한제국은 일본제국 조선국으로, 순종 황제는 이왕 전하·고종 황제는 이태왕 전하로 강등하고 일본 황실에 배속됐다. 그리고 모든 국권은 통감부(조선총독부)가 관할했다. 이렇게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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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모습.

일제에 의한 수탈이 시작되다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이 공짜로 이뤄지진 않았다. 청일전쟁에서 1만 6000여 명의 군사가 죽었고, 러일전쟁에서는 사망자가 8만 명이 넘었다. 부상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또한 전쟁으로 엄청난 비용을 소비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는 일본 국가 예산의 10배를 소비했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 일본은 경제공황 직전까지 몰렸다. 게다가 의병전쟁으로 인한 병력과 물자의 소비, 외교적 비용 등을 포함하면 일제는 그야말로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따라서 식민지화에 성공한 일제는 곧바로 수탈체제로 들어갔다. 병합 직후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약탈하고, 산림령과 회사령을 통해 조선의 임야와 자본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은 당시 80%가 농민이었던 조선 민중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일제는 기존의 경작권이나 특수한 관계를 모두 무시하는 오로지 소유권만으로 토지를 정리했다. 당시 농민들은 토지 소유권과는 별개로 '도지권'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이는 일종의 경작권으로 소유자와는 별개로 경작자는 영원히 그 토지를 경작할 수 있었고, 지주의 승인 없이도 도지권은 매매·양도·저당·상속이 가능한 재산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도지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도지권을 가진 농민은 곧바로 농토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하고 최하층 순수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됐다. 게다가 토지신고 시에 내용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부재지주라는 이유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허다했다. 또한 표면적으로는 국유지나 황실 재산이지만 농민의 권한이나 권리가 상당한 땅도 많았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모두 국유지로 편입시켰고, 농민들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농사를 짓고 있던 농민들 역시 최하층 순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렇게 빼앗은 토지를 친일지주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넘겼다. 1918년 병합 불과 8년 만에 한반도 농지 7.5%는 일본인에게 넘어갔고, 4.2%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했다.

임야조사사업은 더 심했다. 당시만 해도 산은 지역주민 공동의 재산이거나, 문중 공동의 재산이라는 개념이 강했기에 분명한 소유권을 확립하지 않았다. 아예 조선은 임야의 경우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았다. 또한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화전민이 되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임야 소유권은 불분명했다. 1916년 역시 토지조사사업과 비슷한 형식으로 임야조사사업이 이뤄졌고, 임야 가운데 무려 60%가 조선총독부 재산으로 편입됐다.

1910년 12월, 일제는 '조선회사령'을 공포했다. 이 회사령으로 조선총독부가 사업체 승인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갖게 됐다. 조선총독부 허가 없이는 회사를 세울 수 없었다. 일본인들에게는 회사 허가가 수월하게 났으며, 조선인이나 외국인에게는 회사 허가가 거의 나지 않았다. 이 회사령 결과 1919년에 이르면 조선지역 기업 중 78.4%는 일본인 기업이고, 조선인 소유의 회사는 11.6%에 불과했다. 그나마 11.6% 조선인 회사들도 조선총독부의 까다로운 허가 과정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일제에 협력하거나 조선총독부에 좌지우지되는 회사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어업에서도 침탈을 시작했다. 당시 한반도 연안에는 정어리, 명태, 고등어 등 '3대 어종'이 어민들의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한일병합 이후 일본인들이 우수한 기술력과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연안을 휩쓸기 시작했다. 전체 어민 가운데 3~4%에 불과한 일본 어민들은 3대 어종 수확고의 80%를 차지했다. 어장을 상실한 조선 어민들은 일본 어민의 말단 노동자로 전락했다.

탄광은 한일병합 이전부터 일찌감치 일본인들에게 넘어가 1913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탄광 가운데 75%가 일본인 소유였고, 조선인 소유는 1%에 불과했다. 나라를 뺏긴 대가는 이토록 참혹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일본인 히사마 켄이찌는 1910년대 이뤄진 일제의 수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에서의 토지사유제 확립은 과거에 토지의 현실적 보유자였고 또 경작자였던 농민을 희생시켜, 그 결과 소수의 지주와 부유한 농민만이 토지를 취득하고, 대다수 농민은 토지에서 이탈 당하게 되었다."

경남 민중의 저항 '산림조사 불복'

토지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된 경남지역 농민들은 불만이 팽배했다. 그러나 헌병이 치안을 관리하던 무단통치 시기에 민중항쟁이나 봉기로 저항하는 건 어려웠다. 농민들은 사업결과에 대해 불복과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재산과 권리를 지키려 했다. 특히 임야조사사업에서 조선총독부의 결정에 불복신청이 쏟아져 일제를 당황하게 했다. 경남지역 전체 임야 35만 148필지 가운데 2만 578필지에 대해 불복신청이 쏟아졌다. 이는 전국 최고수준이었다. 대부분 조선총독부의 소유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창원군 북면은 607필지 가운데 451필지에 대해 불복신청이 있었다. 일제는 임야조사사업 당시 증빙서류가 부실해도 농민이 산림을 가꾼 것이 확인되면 소유권을 인정해 준다고 했다. 하지만 산림을 가꾼 것이 어디까지인지 분명하게 기준을 세울 수 없었고, 결국 대부분 총독부에 편입됐다. 이에 산에 대한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 불복신청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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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조사사업 측량 모습.

그러나 일제가 불복신청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조사과정에서의 실수가 명백하게 드러났을 때만 불복신청을 받아들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저항의 일환으로 산림을 황폐화시키기 시작했다. 어차피 소유자는 조선총독부였고, 산을 가꿔도 인정받지 못했기에 산림에 대한 애정이 있을 수 없다. 일제는 농민들이 산림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일일이 단속할 수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사태가 악화되자 일제는 1920년대 들어서 방침을 바꾸기로 했다. 조사 기간을 늘이고 임야 임대를 허용하는 등 농민들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그러나 산림 황폐화는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1926년 일제는 조선특별연고삼림양여령을 공포했다. 이 양여령은 연고지가 있는 사람에게 유상이나 무상으로 산림 소유권을 이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듯 조선 민중들은 임야에 대해 일제에 맞서 성과를 냈으나, 농토는 다시 찾을 수 없었다. 1910년대 조선 농민 가운데 가장 말단인 순수 소작농은 35% 내외에 불과했으나, 1920년대를 지나면서 52%가 넘는 농민이 순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거기에 소작료도 과거 5할에서 7할 이상으로 늘었다. 이에 대한 깊은 반감은 훗날 3·1운동, 소작쟁의 등 농민들의 저항으로 이어지게 된다.

참고문헌

-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역사학연구소, 서해문집, 2004

-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창비, 1999

- <고쳐 쓴 한국현대사>, 강민길, 창비, 1994

- <경남도정백년사>, 경상남도, 1996

-「1910~1945년 경상남도 창원군 내서면의 토지소유구조 변동」, 이세영, 『지역과 역사』 21호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서 경남 창원지역의 토지소유권 분쟁」, 최원규, 『지역과 역사』 21호

-「일제의 山林法과 林野調査 연구-경남지역 사례」, 강정원

-「식민자와 조선-일제시기 大池忠助의 지역성과 '식민자'로서의 위상」, 전성현, 『한국민족문화』 49호

-「경남 창원 토지조사의 실시와 지역 주민의 대응」, 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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