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부족함 채우기 위해 진화
헌신적 사랑도 '에로스'에서 비롯

올해 개봉한 <모아나>, <라라랜드>, <미녀와 야수>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자기애적인 사랑이다. 과거 고전극의 대부분이 헌신적인 사랑, 아가페적 에로스라면 현대의 사랑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여기에서 타자는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일 뿐이다.

신학자 앤더스 니그렌 역시 <아가페와 에로스(Agape and Eros)> 저서를 통해 보상 없는 아가페적 사랑과 자기중심인 에로스적 사랑에 대해 주목한 바 있다. 아가페와 에로스,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인가? 현대를 살아가는데 있어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그런데 필자는 다른 이를 향한 이 헌신적 사랑이 사실 자기애적인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격의 성장을 자기애 관점에서 먼저 찾으려 했다는 것만 봐도 자기를 향한 도착적 에로스에 대해 한번쯤 깊이 사색해볼 만하다.

인류역사에 있어 인간은 타자를 향한 희생적 사랑에 대해 늘 배워왔다. 유아기 에 엄마로부터 받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시작으로 유치원과 초등,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쳐 한 가정의 부모가 되기까지 타인을 향한 희생적 사랑이 갖는 숭고함은 가히 환상적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에로스적 본능이 있어야지만 타인에 대한 사랑 역시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올해 개봉해 화제를 일으킨 <모아나>, <라라랜드>, <미녀와 야수> 캐릭터들을 보면 타인과 함께하는 사랑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 속에는 주인공들 각자 잠재된 욕구와 절박함이 사랑으로 표출되고 있다.

'모투누에' 섬에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전설의 영웅 '마우이'와 여행을 떠나는 '모아나'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부족 평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족을 위한 무조건적인 사랑에 앞서 수장으로서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평가받고자 하는 자기애적 사랑이 담겨 있다. 바로 이 자기애적 에로스가 타자애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요체인 셈이다.

최근 상영 중인 <미녀와 야수> 캐릭터 또한 자세히 분석해 보면 마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만은 아니다. 주인공 벨의 이기적인 자기애착은 마법에 걸린 야수를 위험에 이르게 하고 야수 또한 자신의 마법을 풀기위해 벨을 이용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로스신의 화살은 사실 타인을 사랑하게 만드는 화살이 아닌 자기 자신을 광적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자기애적 사랑을 심어주고 있는 셈이다.

김정은.jpg

그렇다면 사랑은 과연 아름답기만 한 것일까? 아마 사랑의 이면을 보면 그 어떤 것보다 치열하고 잔인하며 광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수많은 이름의 다성적 에로스를 통해 삶의 가치를 찾아왔다. 여기에는 자기 도전, 자기 개발이라는 '존재적 전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진화해 나간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타적인 사랑 속에 억눌려있는 자기애가 지닌 에로스의 빛을 제대로 파악 못하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우회해서 생각해보면 현대에 있어 자기애가 지닌 다면성이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배가해주고 획일화된 틀에 묶인 인간의 개별성을 깨워주고 있는데 말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