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완강했던 폭염의 어깨가 무너지고 아침마다 감빛으로 물들인 광목천만 한 근육을 가진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이다. 익어 고개 숙인 벼는 자신들의 금을 다 드러낸 채 겸연쩍게 들을 치장하고 섰고 밤이면 처연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온다.

올해는 유난히 덥고 가물었다. 뜨거운 햇볕에 모기의 날개마저 말라버렸으니, 경쟁 속에서 잇속을 다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사야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어느새 하늘은 높아졌고 나무는 깊다. 떨어지고 거둬진 열매들에서 나무와 숲과 사람의 고민을 생각해 보기 좋은 계절이다. 그것뿐이랴.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책이 몸에 착착 감기는 계절이기도 하다.

코스모스가 핀다. 가느다란 대에서 문득 화려하진 않으나 수수한 색감의 잎을 펴보이는 꽃이 코스모스다. 활짝 핀 코스모스의 암술과 수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에! 별 속에 작은 별들이 총총히 꽃잎 속에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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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코스모스라고 처음으로 칭한 사람은 수학자 피타고라스. 아주 작디작은 꽃잎 속에 별들이 숨어 있으니, 꽃잎 한 장에서 우주를 다 본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라고 한 폴 발레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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