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 출신 김주석 선생 친필 수기 공개…일제 시대 고문·형무소 생활 등 생생하게 기록

지난 1993년 작고한 진해 출신 항일인사이자 미술가인 괴암 김주석 선생의 친필 수기가 공개됐다.

김주석 선생 기념사업을 추진 중인 전점석 문화공간 흑백 회장은 20일 오후 김주석 선생이 '자서전'으로 분류한 친필 수기를 <경남도민일보>에 제공했다. 1983년에 작성된 이 수기는 그동안 고문 장면 스케치 등 일부 내용이 부분적으로 알려진 바 있으나, 그 내용 전체가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 회장은 "김 선생의 자택에 이 같은 친필 메모가 몇 박스가 된다. 계속해서 공개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이어 "김주석 선생은 메모광으로 다양한 분야에 사소한 정보까지도 모두 메모했다. 메모 공개를 통해 지역사 연구 및 현대미술교육 연구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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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석 선생./전점석 제공

이번에 <경남도민일보>가 입수한 친필 수기에는 부산형무소 피감 생활, 일제 헌병에게 당한 고문과 심문, 재판 기록 등이 스케치와 함께 상세하게 기록돼 있으며 해방 전후 불려진 노래, 친일파의 분류와 행적, 항일결사단체 학우동인회 결성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진주 지역 한 친일파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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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석 선생의 친필 수기 '자서전' 표지./전점석 제공

"일본어 상용계몽에 앞장서서 우리말 우리글을 완전 무시하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본어를 사용하는 이가 왜놈에게 격찬을 받고서

자기 행동이 절대 옳은 것으로 인식하고는

심지어는 일본어를 자기 가정에서 사용하면서

자기의 친 부모가 이야기를 하는데

조선말은 못한다 하면서

부모님과의 대화에 아들이 일본말을 사용하니 부모가 못 알아들으니

돈을 주어 통역관을 세워서 일본어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자기 부모와 통화를 하였다는 악질적인 불효자가

일본어 상용의 철저한 모범자로 선발되어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하는 국어상용의 특별 표창을 받은

악질적인 친일파가 있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친일파가 누군지는 수기에서 언급하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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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석 선생이 목격한 일제 헌병이 항일인사에게 가하던 고문 장면 스케치. 수기에 따르면 이 고문을 당한 사람은 고문 후 사망했다고 한다./전점석 제공

김주석 선생은 1927년 진해 출신으로 16세인 1943년 1월 경성전기학교 학생들과 함께 항일결사단체인 '학우동인회'를 결성했다. 친필 수기에 따르면 학우동인회는 맹세서에서 "우리는 빼앗긴 조국강토와 자주 독립국가를 쟁취하기 위하여 필사적 노력을 다 할 것을 맹세한다"고 했으며, 실천사항으로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탄압을 분쇄, 일본 침략주의자를 격멸, 일본의 피의 수출강요를 반대, 조상의 문화전통을 사수한다"고 했다.

이어 주요 활동계획에서는 '조선총독부 총독 암살, 일본정치 고위 관리 암살, 일본(조선)총독부 행정 마비, 통신군사시설 파괴, 독립군에 정보 제공, 우리말 우리글 고수 투쟁, 동포들의 문맹 퇴치, 극한적인 사태 발생 시 해외로 탈출'을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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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결사단체 학우동인회 발기인 명단./전점석 제공

그러나 1944년 진해헌병대에 체포돼 친일헌병인 신상묵 등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받은 후 부산형무소에서 수감 중 1944년 8월 1일 가석방됐다. 해방 이후 미술교사로 46년간 근무했으며 초대 마산미술협회 사무국장, 8~9대 마산미술협회장을 지내는 등 미술인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다 1993년 12월 29일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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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미군 진주 당시 진해지역에 걸렸던 환영 조형물./전점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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