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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경남 고속도로' 고성에서 마무리

[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81) 통영별로 47회차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webmaster@idomin.com 2014년 12월 22일 월요일

벌써 한 해의 마지막인 동지입니다. 한파가 절정에 이르며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드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날 예전 사람들은 창호에 여든한 송이 매화꽃이 달린 매화 가지를 그려두고 하루에 한 송이씩 매화를 붉게 그려 넣으면서 봄을 기다렸습니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 하는데, 여러분도 이런 마음으로 겨울을 지워가다 보면, 81일째 되는 날 문 밖 뜨락에 붉게 핀 매화를 만나듯 그렇게 겨울을 견딘 고운 봄을 맞을 수 있겠지요.

상동천 가를 거슬러

지나온 길도 그랬지만, 오늘 걸을 통영별로 옛길도 33번 국도가 덮어쓰고 있습니다. 고성군 상리면 척정의 고인돌공원에서 오산리 중촌마을을 향해 국도 아래로 난 굴을 지나니 사천강 지류 상동천 제방을 따라 오롯이 길이 나 있습니다. 해바라기하기 좋은 산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로 눈길을 주니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 기스락을 따라 아스라이 열려 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심부름으로 아버지께 새참 내 드리러, 소 먹이러, 꼴 베러 다니던 그런 길입니다. 도로와 떨어져 있는 조용함이 걷기에는 좋습니다만, 들녘을 타고 내려와 귓가를 때리는 골바람은 잡생각을 몰아낼 만큼 서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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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촌 가동 망림 들녘을 적시는 상동천을 거슬러 오른 길은 무이산 자락 팔송정에 있는 지석묘를 살피기 위해 망림교를 건넙니다. 다리 남쪽 길가에는 세운 지 오래되지 않은 창원 황씨 효자비가 있고, 양쪽으로는 꽤 알아주는 칼국수집이 성업 중입니다. 국도 아래로 굴을 통해 팔송정 마을에 드니 들머리 정미소 옆 감나무에는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길벗들은 아예 재미를 붙였는지 이번에도 떨어진 홍시를 주워 단맛을 탐합니다. 이제 저 감은 1960년대 초 펄벅 여사가 경주를 방문했을 때 본 까치밥으로 남겨둔 그런 감이 아니기에 몇 개 더 따 먹어도 되련만 왠지 그걸로 만족해합니다.

팔송정 마을에는 이름과는 달리 수십 그루 소나무 마을숲이 도로 안팎에서 시작해 동구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대부분은 지난 걸음에 사천 정동면 대곡리 한실숲처럼 내륙에서 잘 자라는 홍솔입니다. 달리 숲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는 없지만, 숲속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무덤에서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연륜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솔숲이 자리한 길가와 마을로 이어진 곳에는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 아홉 기가 있습니다. 마을 앞 무덤가에 여덟 기가 있는데, 모두 납작한 화강암 계통으로 상석을 삼은 남방식 고인돌입니다. 상석은 크다 해도 길이가 2미터에도 미치지 않아 작은 편이며, 지난 번에 본 척정리 지석묘와 크기와 구조가 비슷합니다.

고성 팔송정 앞 통영별로.

다시 첫걸음을 떼는 자리에는 청동기시대 집터가 있었습니다. 지금 도로를 확장할 때의 발굴에서였는데, 마을 주변 고인돌을 만든 주인공들이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도로 양쪽 솔숲과 그 사이가 당시 사람들 마을인데, 발굴보고서를 보니 이들은 평면이 둥근 움집을 짓고 주변에 갈무리한 식량을 보관하던 저장 구덩이까지 갖추고 살았습니다. 이 시기라면 이미 벼농사가 보편화되었던 때이니 식량을 비축해 두고,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사내들이 짐승 사냥을 다니기도 했을 겁니다.

감티를 넘다 

팔송정에서 청동기시대 살림터와 무덤을 살피고 다시 감티로 향합니다. 도로 건너편 망림리에는 삼국시대 이래 사람들이 산 자취가 두어 곳에 남아 있고, 33번 국도가 북쪽 영현면과 남쪽 삼산면으로 갈라지는 부포사거리는 예전부터 교통 요충을 이룬 듯 장성거리(장성가 長城街)라는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또 그즈음을 장터거리라 했던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사통팔달했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지리적 이점이 장성거리 배후에 조선시대에 독을 짓던 가마터가 자리 잡았던 까닭이겠지요.

낙남정간 줄기에 있는 고성군 상리면 부포리 감티.

부포사거리를 지나 감티마을로 잡아들면, 안쪽에 꽤 연륜이 느껴지는 재실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남원 함양 곤양 사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른 백민일과 아들 백이신이 옥천 초계 등지서 전공을 세운 부자의 나라 구한 충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전합니다. 당시 백민일이 참가한 전장이 통영별로가 지나온 남원 함양 사천이라 하니 새삼 지나온 길이 되새겨집니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그리 높지 않은 감티(감치 甘峙)를 넘습니다. 감티는 무량산과 갈모봉 사이에 발달한 잘록이로 고성읍과 상리면의 지경고개입니다.

거시적으로 살피면 이 고개가 갖는 의미는 사뭇 커집니다. 바로 우리 지역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산줄기 낙남정간(洛南正幹)이 지나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낙남정간은 백두산이 남쪽으로 흘러내리면서 형성한 백두대간의 종점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의 다른 이름) 영신봉(삼신봉이라고도 함)에서 김해 대동면 매리의 신어산 북동쪽 자락까지 줄기를 이어가는 우리 지역의 뼈대와 같은 산경입니다. 낙남정간을 통영별로 옛길과 관련해서 살피자면, 이 고개를 넘으면 이제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한 바다가 머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통 산경체계에서는 이 산줄기를 기준으로 낙동강 남쪽의 내륙과 남해 바다와 연하는 해안으로 나누는 지리적 경계로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고개에선 갯내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감티를 내려서는 길은 무량산 동쪽에 있는 철마산 남쪽 기스락으로 난 옛 33번 국도를 따릅니다. 고갯길을 몇 굽이 돌다보니 멀리 고성읍이 눈에 들기 시작합니다. 이즈음이 대밭골이고 이 골짜기를 돌아서면 부처골인데, 지명으로 보면 돌부처가 출토된 절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부처골에서부터 고성읍 교사리로 드는 길은 대독천 북쪽으로 곧게 열려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이당리를 벗어나는 면밭골은 엄밀한 의미에서 고성읍이라 할 수 있는 교사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입니다. 예전에 목화를 키우던 곳이라 면밭골(면전 棉田) 이름이 남았습니다.

교사리로 드는 길에는 얕은 재를 넘습니다. 이곳에는 지금의 33번 국도를 확장할 때 청동기시대 집터와 그때 사람들의 돌널무덤이 조사되었는데, 돌널 안에서는 두 점의 가지무늬 토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사천 소곡리 고성 척정리 팔송정에서 이어지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남긴 삶의 자췹니다. 이런 자취는 경남항공고 북동쪽 모서리 고인돌로도 이어집니다. 이 길을 지난 군부대 앞 육송에는 구품송(九品松)이라 새긴 작은 빗돌이 있습니다만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이즈음에 드니 멀리 들판 뒤로 가야시대 수장들의 무덤 송학동고분군이 보입니다. 소걸음으로 쉬지 않고 천천히 걸은 이 길이 어느새 한양 천리 길을 돌아 통영로와 통영별로가 만나는 이곳 고성 동외광장교차로에서 마감합니다.

고성군 송학동고분군과 칠성바위 고인돌.

길이 멀어 못 갈 곳 없네

고운 최치원이 찬한 <쌍계사진감선사대공령탑비>(887년)의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을 이렇게 푼 것입니다. 원문에는 '부도불원인(夫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이라 했으니 '무릇 도(길)란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고, 사람에게 이국은 없다'는 내용인데, 누가 그랬는지 앞의 다섯 글자를 '길이 멀어 못 갈 곳 없다'고 풀었습니다. 지나친 의역이다 싶기도 하지만 멋진 풀이라 여겨집니다. 이 말은 그때도 이미 탁월한 생각이지만 지금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너무나 어울리는 말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것은 길(방법)이 없어서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뒤에 이어지는 말은 그걸 이루려는 열정에는 이국이나 경계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니 더욱 그러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3년 8개월간 여든 한 차례에 걸쳐 연재한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옛길 걷기에 동행해 주신 길벗들과 지상 중계에 동행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끝> 

/글·사진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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