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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남은 진주 제민창의 흔적을 더듬으며

[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77) 통영별로 43회차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장) webmaster@idomin.com 2014년 10월 27일 월요일

오늘 걸을 통영별로 옛길은 대체로 3·33번 국도가 덮어쓰고 있어 찾기는 어려움이 없으나 최근 이 길이 확장되고 사천 들머리까지는 남해고속국도가 나란히 열려 자동차가 내지르는 굉음이 줄곧 귓가를 때립니다.

사천에 들다

경상대학교를 벗어나면서 통영별로 옛길은 국도에 자리를 내어주고 곁으로는 고속국도가 나란히 달리고 있습니다. 가운데고개라 불리는 재를 넘어 정촌면에 드니 대전~통영간고속도로가 교차해 지나면서 입체교차로가 가로막고 있어 이 일대는 가히 도로 전시장을 방불케 합니다. 그즈음이 화개리 화동인데, 옛 이름은 화곡(花谷)입니다. <조선오만분일도> 거제도 14호 진주 지도에는 가운데고개에서 예하리 목괴마을에 이르는 구간은 낮은 구릉의 마루를 따라 길이 열려 있고, 마을의 옛 이름은 금산동(金山洞)이라 적혀 있습니다. 예하리를 지나 사천시 축동면으로 들면서 옛길은 남해고속도로와 헤어져 남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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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평리 동쪽 원동마을 즈음에 제민촌이라 적어 두었는데, 바로 이곳에 두었던 진주의 상하제민창(上下濟民倉)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제민창은 그 이름에서 보듯이, 조선시대 후기에 지역 여러 고을에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창고를 이릅니다. 이곳 사천의 제민창은 포항의 좌제민창과 더불어 경상우도의 사천에 추가로 설치한 우제민창으로서 영조 39년(1763) 10월 10일 창고 건립이 완성되었고 같은 달 18일 <영남 제민창 절목>이 반포되면서 본격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완성된 제민창은 지금의 진사공단 내 삼성항공 자리에 둔 것을 이르며, 이곳 길평리의 제민촌은 정조 16년(1792)에 원래의 것에 더하여 곤양의 제민창과 함께 추가로 운영한 진주의 상하제민창입니다. 이곳에 두었던 상하제민창은 1894년 갑오개혁 때 근세 역제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모습을 감추고 이름만 남기고 있을 뿐입니다.

옛 제민창의 흔적을 더듬으며 사천으로 길을 고쳐 잡으니 축동면 소재지에 듭니다. 그즈음에 이르렀을 때가 마침 중화참이어서 우리는 거기서 마음에 큰 점 하나씩을 찍고 다시 슬슬 길을 나설 채비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는 빗돌 3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 그곳으로 눈을 줍니다. 북쪽으로부터 부인안동권씨시혜비, 김해김공성환공적기념비, 비서승김해김인옥시혜불망비가 나란히 서있습니다. 그 가운데 권씨 시혜비의 마지막 구절에는 돌에 새겨 길가에 세운다고 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빗돌을 세우는 뜻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널리 보이게 할 양이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고, 빗돌이 길을 헤아리는 잣대임을 다시 깨우쳐 줍니다.

사천읍성

제민창지에서 길호강을 건너면 사천이 지척입니다. 이 강이 사천만으로 드는 즈음은 조선시대에 사천과 하동을 뱃길로 잇던 장암(場巖) 나루가 있던 곳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이 지리산을 유산하고 쓴 기록인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보면, 1558년 봄에 두류산(지금의 지리산)을 찾은 남명 선생도 개양에서 사천으로 들어설 때는 지금 우리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당시에 선생은 기거하던 합천 삼가 외가에 있던 계부당(鷄伏堂)을 출발하여 금산에 있던 자형댁에서 하루를 머뭅니다 그런 다음 이튿날 사천에 들러 구암 사람 이정의 집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장암 앞에 있던 쾌재정(快哉亭)을 등람합니다. 그러고는 장암에서 배에 올라 곤양 앞바다를 지난 다음 섬진강을 거슬러 섬진나루에서 배를 내려 하동 땅에 들었던 것입니다.

길호강을 건넌 즈음은 수석리인데, 옛 이름은 사천강의 북쪽에 있다하여 수북(水北)입니다. <조선오만분일도> 진주 지도에는 수북을 지나 시내로 드는 곳을 두고 비석항(碑石巷)이라 적어 두었는데, 그것은 비석거리라는 뜻입니다. 이곳을 지나면 옛적 사천읍성이 있던 곳입니다.

사천읍성. 오른쪽으로 옛 성벽이 보인다.

이 성은 세종 임금 때에 정의리와 선인리에 걸친 구릉과 평지를 의지해 흙과 돌을 섞어 쌓은 평산성(平山城)입니다. 성을 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종실록> 9권 1년(1451) 9월 5일에 충청전라경상도도체찰사 정분(?~1454)이 올린 글에 "사천현 읍성은 주위가 3015척, 높이는 평지가 11척 5촌이고 높고 험한 곳은 10척 5촌이며, 적대가 15군데이고, 문이 3군데인데 옹성이 있고, 여장이 580개이며, 성안에 우물이 7곳이 있고, 해자는 아직 파지 않았습니다"고 전합니다.

또한 <경상도속찬지리지> 사천현에는 "현성은 을축년 세종 27년(1445)에 쌓았고 석축의 둘레는 3015척이며 높이는 15척이다. 성안에 군창(軍倉)이 있고 샘과 우물 세 곳은 여름이나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앞 기록에 비해 성벽이 더 높은 것으로 나와 있어 뒤에 증축되었음을 일러줍니다.

정유재란 때인 선조 31년(1598)에 왜장 시마즈 부대에 점령당하였으나 그해 9월 경상도병사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조선군과 명나라 연합군이 혈전을 치르고 탈환하였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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