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독립된 주체로 보지 않는 호칭…30대 이상 독신여성 당당한 호칭 없나?

그날은 꽤 점잖았다. 평소 즐겨 신던 운동화를 벗은 날이었다. 오피스 드레스의 정석인 구두와 정장 바지를 입고 아파트 경비실을 막 지나치던 오전 8시,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경비 아저씨였다.

"저기…. 1801호 사모님! 쓰레기봉투를 문 앞에 내놓으면 안 됩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사모님이라고? 당혹스러웠다. 내 나이 38살, 사모님 소리를 듣기에는 좀 이른 나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내가 늙어 보인다는 얘기인데…. 짧은 시간, 몇 가지 불쾌한 경우의 수가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보기엔 상황이 궁색했다.

"저는 사모님이 아닌데요"라고 반격의 멘트를 날렸다간 오히려 "이런, 사모님이 아니었어요?"라고 정색이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고 사모님이라는 세 글자를 안고 출근할 수밖에 없는 판이었다.

그저, 나지막한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침, 나는 결심했다. 앞으로 또다시 나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대비해 나만의 합리적인 명분과 탈출구를 마련하기로. 생각을 거듭한 결과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저는 사모님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내가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거부하는 이유, 사모님이라는 단어가 주는 '나이 듦'의 이미지가 싫어서가 아니다. 내 나이가 38살이 아니라 78살이라고 해도 나는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거부할 것이다. 여성을 독립적인 주체로 부르는 호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사모님은 '선생의 부인이나 혹은 사장의 부인' 등 윗사람의 부인을 일컫는다. 즉, 남편의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여성을 부르는 호칭이라는 얘기다. 호칭은 부름을 받는 사람의 정체성과 사회구성원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그러하기에 사모님이라는 단어는 여성을 남성 의존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사고라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예로 골프장을 들 수 있다. 물론, 나는 골프를 못 친다. 아는 선배에게 들은 얘기다. 골프장에서 고객을 부르는 호칭은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남성은 고객님으로! 여성은 사모님으로! 왜, 여성 고객은 고객님이 아니라 사모님으로 부르는 걸까? 골프장 이용 여성 중에는 직접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 없어서? 아니면 모두 결혼을 해서 남편이 있을 것 같아서? 그것도 아니면 무엇인가? 그저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사용해 온 호칭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사모님이라는 세 글자에 물음표를 던져야 하지 않을까?

올해로 38살인 나는 아직 비혼이다. 나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호칭은 곳곳에 널려있다. 우리 사회에서 30세가 넘은 여성을 부르는 호칭은 대부분 결혼을 전제로 한다. 누군가의 부인 혹은 엄마이다. 결혼을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난감한 상황을 맞이할 때가 많다. 언젠가 유치원생 조카를 데리고 마트에 간 적이 있다. 장난감을 고르는데 마트 직원이 나에게 "어머니!"라고 불러서 "저는 어머니가 아니라 손님입니다"고 대꾸했던 경험이 있다. 누군가의 엄마라고 불리기를 바라는 여성도 있겠지만, 나처럼 비혼인 30대 여성에게 어머니라는 호칭은 불쾌하다.

왜, 30세 이상의 여성은 모두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가? 내 주변에는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한 친구들도 많다. 그들에게 어머니라는 호칭은 난감함을 넘어 상처를 줄 수 있는 단어이지 않을까. 바야흐로 성 평등을 지향하는 21세기, 하지만 안타깝게도 언어의 평등은 아직 오지 않았다. 여성을 차별하고 있다. 언어가 사고방식을 지배한다는 언어 상대성 이론에 동의한다면 여성을 차별하는 호칭 또한 바꿔야 한다.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는 여성의 호칭을 미래 지향적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남편과 자녀 중심이 아닌 오롯이 여성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호칭을 개발해야 한다. 먼저, 현재 남성에게만 사용되는 호칭을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평등하게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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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인 문화로 만들어가는 게 힘들다면 개인부터 시작해 볼 필요가 있다. 나부터 나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호칭에 당당히 맞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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