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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 비 기다리던 사근산성

[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69) 통영별로 35회차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webmaster@idomin.com 2014년 07월 07일 월요일

지난번에는 월명(月明)과 만덕(萬德)이란 여인과 관련한 사적을 살피느라 백천리만 맴돌았습니다만, 사근역에도 살필 게 많아서 오늘도 재게 걷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백천리를 지나다

백천리는 한자로 흰 백(白)에 내 천(川)자를 쓰지만, 백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 척지(尺旨)이므로 백은 잣 백(栢)으로 표기하지 않았었나 생각됩니다. 척(尺)이 성을 이르는 옛말 '자'를, 지(旨)가 마을을 이르는 '마'를 적기 위해 한자의 뜻을 빌린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북쪽에 상백(上栢) 내백(內栢) 등의 마을이 있고, 그 앞 들판을 잣들=백평(栢坪)이라 부르는 것도 백천리의 원래 한자표기가 백천리(栢川里)였을 가능성을 높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오래된 성(城)-그것도 토성(土城)-이 있었을 터이니 다음에 조사해 보겠습니다.

백천리를 지나 월명촌으로 드는 길가에는 빗돌 2기가 서서 옛길이 이리 지났다고 일러줍니다. 하나는 정순필(鄭淳必)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인데, 1889년 조정에서 조봉대부를 추증하고 1891년에 정려를 내렸다고 전합니다. 다른 하나는 정순필의 아들 정태원(鄭台元)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수혜자들이 1931년에 세운 선정비입니다. 빗돌을 지나 월명과 그의 정인이 묻혀 있는 월명산을 뒤로 하고 들을 가로질러 남강 윗물줄기를 건너면 사근도의 본역인 사근역이 있던 역말에 듭니다.

◇사근도의 본역 사근역

역말 들머리에는 군수·관찰사·사근역 찰방을 지낸 이들의 선정을 기리는 빗돌 6기가 길손을 맞습니다. 역의 북서쪽 바깥에 도열하듯 세워져 있어서 옛길은 지금의 사근교보다 약간 더 북쪽으로 열렸음을 알 수 있고, 비록 짧은 구간이지만 지금도 옛길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사근역은 고려시대에 산남도에 딸린 역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사근도의 찰방이 주재하는 본역이 되었습니다. 수동면 소재지인 화산리 사근마을이며, 달리 역말이라 했는데 지금도 화산리의 중심지입니다. 1911년에 간행된 <조선오만분일도> 전주3호 안의(安義) 지형도에는 사근역을 지금의 경찰서, 면사무소, 농협 등 공공건물이 들어선 곳으로 표시하였고, 맞은쪽도 많은 건축물이 들어선 가촌(街村)의 모습입니다. 이것만 봐도 찰방이 주재하던 본역의 규모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정 치소가 갖추고 있던 관아와 객사 정자 등을 비롯하여 말을 관리하던 시설까지 포함되었으니까요. 수수정(數樹亭)이란 정자도 있었는데, 정조 때 사근도 찰방 능호 이인상이 김원박의 시에 차운하여 준 사역잡술에 나옵니다. 이름이 수수정이니 풍치림으로 조성한 역수(驛樹)가 있었고 그 사이에 정자를 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근산성 봄 술에 곤드레되어. 수수정에서 낮잠을 실컷 자네./ 미관말직으로 충성 못함이 부끄러우니/ 삼년 지나도 마의경을 터득하지 못했네."

이덕무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에 실린 사근역선생안에는 이인상은 음보(蔭補)로 영조 정묘년(1747) 7월에 찰방으로 왔다가 기사년(1749) 8월에 돌아갔다고 나옵니다. 문인들과 시·서·화를 교류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글씨는 전서를 잘하여 김정희(金正喜)는 "전각은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 없다"고 하였을 정돕니다. 그림도 경지가 높은데, 유홍준 교수는 그의 문인화가 조선시대 통틀어 으뜸이라 치켜세웁니다. 저도 그의 설송도(雪松圖)를 좋아하는데요, 엷은 먹으로 바림하고 짙은 먹으로 굴곡과 윤곽을 표현한 눈 맞은 소나무 그림에서 곧고 강직한 기상을 읽을 수 있어서지요.

   
  1700년대 이인상이 그린 설송도. /국립중앙박물관  

이인상의 다음 시절에 사근역 찰방을 지낸 청장관 이덕무의 <한죽당섭필>에는 사근역과 함양의 고사가 많이 나옵니다. 견문기 겸 만록(漫錄:일정한 형식이나 체계 없이 느끼거나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으로 영남의 명승·고적과 인물·풍속 등이 적혀 있습니다. 정조 2년(1778)에 규장각 검서관의 직함을 띤 채 외직인 사근역 찰방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이때 종형이 통제사로 부임하게 되어 천안 객사에서 인사하고 사근역을 향해 출발하였다고 전합니다. 그가 부임할 때 우리가 지나온 통영별로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수수정에 관한 글에 "능호 이인상이 사근역 찰방일 때 설치한 것이 많고 마음가짐을 공명하고 염직(廉直)하게 하여 관리들을 단속하였다. 내가 늙은 아전에게 50~60년 동안 어떤 관원이 가장 훌륭하게 다스렸느냐 물으니 능호라 답하였다. 대개 서화와 문사에 종사하는 사람은 거의가 사무를 알지 못하니, 미전(米顚:송나라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지만 당나라 복장을 흉내 내고 수석을 모으는 취미가 지나쳐 당시 사람들이 '미치광이(미전)'라고 불렀다)과 예우(倪迂:당나라 때 시화에 능했던 사람) 같은 사람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능호는 이치(吏治)를 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아의 동헌에 건 한죽당(寒竹堂)이라는 편액을 대전(大篆)으로 팠는데 자못 강하고 굳세게 보였다. 마루 동쪽 모퉁이에 두충·홍매와 고송·수죽 등속이 심겨져 있으며, 능호가 조그마한 기와 정자를 나무 사이에 세웠는데 동쪽으로 연못을 내려다보아 소연(蕭然)한 풍치가 있으며, 수수정 편액은 문의 현령 송문흠(宋文欽)이 쓴 팔분체(八分體)였다. 그리고 북쪽 기둥에는 능호가 쓴 글이 걸려 있었는데…"라 전합니다.

이즈음 함양과 안의에는 알만한 분들이 더러 벼슬살이를 하셨는데, 연암 박지원이 으뜸입니다. 정조 15년(1791)에 안의현감에 제수되어 재직 중에 수차·베틀·물레방아 등을 제작 사용케 하여 백성들 생활환경 개선에 애썼습니다. 더욱이 문체반정(文體反正)의 표적이 된 <열하일기>에 실린 중국의 실용 기술을 적극 보급하면서 실사구시를 실천했습니다.

◇사근산성

사근역의 배후 구릉에는 사근산성이 있습니다. 사근은 '오래된', '묵은' 등의 뜻을 가진 '삭은'을 한자로 차자표기한 것입니다. 사근산성은 오래된 산성이란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 고유명사화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전기에 이미 산남도에 딸린 사근역이 있었으니, 산성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근산성 안에는 못이 있어 조선시대에는 기우제도 지냈는데, 아마도 산꼭대기의 못에 빌면 쉬이 비를 구할 수 있으리라 여긴 모양입니다.

   
  함양군 수동면의 사근산성. /문화재청  

조선 후기에 사근산은 달리 미타산이라고도 불렸는데, 남쪽 기슭에 있던 미타사란 절에서 비롯했습니다. 이덕무의 <한죽당섭필>에 "미타산(彌陀山)은 사근역의 주산(主山)이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2796척이며, 연못이 세 군데 있는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낸다. 고려 신우 6년(1380) 경신에 왜놈 배 500척이 진포(鎭浦:지금 군산)에 정박하고 삼도를 노략질하되 상주부의 창고를 불 지르고 경산을 거쳐 사근역에 주둔했다.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 등 아홉 장수가 왜와 사근역 동쪽 3리쯤에서 싸우다 패하여 박수경과 배언 두 원수가 전사하였고, 전사한 사졸들이 500여 명이 되어 냇물이 다 붉었으므로 지금까지도 피내(혈계=血溪)라 한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이 싫어서 국계(菊溪)라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때에 감무였던 장군철(張群哲)이 산성을 지키다 도륙당했으므로, 왜적이 남원으로 향하여 인월역에 주둔했다가 우리 태조(이성계)에게 섬멸되었다. 산성이 허물어졌으나 수리하지 않았는데 성종조에 다시 쌓았고 지금까지 다시는 수리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전체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고, 마지막 한 문장만 추가된 것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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