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60) 통영별로 26회차

입춘첩 붙인 지가 엊그제인데 절기가 어느덧 우수를 지나 이번 주에 경칩을 맞으니 바람이 그리 차지는 않습니다. 매화는 만개한 곳이 많을 만치 날씨도 많이 따뜻해져서 걷기에 마침맞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 여정은 주인을 살린 의견 설화의 발상지 오수(獒樹)에서 나섭니다.

◇거령현

전북 임실군의 이곳 오수는 옛 거사물현(居斯勿縣)인데, 통일신라가 백제 옛 땅에 설치한 10군영의 하나인 거사물정(居斯勿停)이 있었습니다. 경덕왕 때 청웅현(靑雄縣)으로 고쳐 임실군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고려 현종 9년(1018) 거령현(居寧縣)으로 고쳐 남원에 속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거령현을 임실군 청웅면 또는 지사면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청웅면은 오수면에서 수계와 산계를 서쪽으로 한 번씩 건너야 나오는데, 곧 임실군청 남서쪽입니다. 달리 오수면 동쪽 지사면 영천리를 옛 거령현의 중심지로 비정하기도 합니다. 김개인(金蓋仁)이 살던 곳으로, 오수 의견 설화의 생성지를 중심에 둘 때에는 지사면 일원으로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집니다.

결정적인 단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고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령폐현:거(居)는 거(巨)로도 쓴다. 본래 백제의 거사물현인데, 신라 때 청웅현이라 고치고, 임실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내속시켰다. 영성으로도 불리는데, 부의 동북쪽 50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방향과 거리는 같은 책에서 오수역이 부의 북쪽 40리라 한 것과 견주면, 거령폐현이 오수역 동쪽으로 조금 치우쳐 더 북쪽에 자리하게 되므로 지금의 지사면 일대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같은 책 남원도호부 산천의 거령천의 흐름과 위치를 보아도 그리 알 수 있습니다. 거령천(居寧川)은 '거령현 개고개(介峴)에서 나와 오수역 동남에 이르러 임실현 평당원천(坪堂院川)과 합하여 남쪽으로 흘러 순창군 적성진(赤城津)으로 들어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수의 주인 살린 개 이야기

고려 고종(1213~1259년) 때 문인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실리면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유명한 이야깁니다. 줄거리는 주인 김개인이 나들이 갔다 술에 취해 돌아오다 풀밭에서 잠이 들었을 때 들불이 나자, 개가 몸에 물을 적셔 주인 주위의 풀을 축여서 주인을 살리고 개는 지쳐 죽습니다. 잠에서 깬 주인은 자기를 살리고 죽은 개를 애도하며 그 자리에 묻어주어 의로움을 기렸습니다. 주인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개 무덤 표지로 삼았는데, 그것이 자라나 개 나무(오수:獒樹)가 됐습니다. 그러니 이곳 오수 의견 설화가 원조이자 대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현종 시인이 '개들은 말한다'라는 시에서 "개들은 말한다 나쁜 개를 보면 말한다 저런 사람 같은 놈"이라는 구절이 절실하게 와 닿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의견 설화 여러 유형 가운데 분포가 가장 광역적인 것이 오수처럼 불을 꺼서 주인을 살린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으로 전국 스물한 곳에 분포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우리 고장 밀양 부북면 제대리와 무안면 마흘리의 경계를 이루는 개고개에도 연리(요즘 세무공무원) 허초벽의 목숨을 구한 의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오수 의견 설화는 이곳에 있는 원동산(園東山)의 의견비에 적혀 있으나 새긴 글은 모두 닳아 없어졌고, 뒷면에서 비를 세운 이들의 성인 김(金) 조(趙) 박(朴) 리(李) 등만 겨우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 곁에는 당시 개 주인이 꽂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늙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고, 비각 남쪽에는 역대 관찰사와 부사, 찰방들의 선정비 9기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전북 임실군 오수 의견비각. /최헌섭

◇오수도 찰방역

원동산을 지나니 마을 사이에서 옛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길을 따라 마을을 벗어나자 제법 큰 내를 만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다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장수읍 식천리와의 경계에 있는 개고개에서 발원한 거령천으로 지금은 오수천이라 부릅니다. 오수천을 건넌 즈음이 옛 오수역 자리인데, <조선오만분일도> 전주 제11호 임실 지도에는 지금의 금암리 금암마을에 오수역(獒樹驛)을 표시해 두었습니다만, 지명으로는 '관들'에 있었던 것으로 헤아려집니다. 오수 역관이 있던 들이라 그런 이름이 남았고, 들을 달로 잘못 인식하였는지 한자로는 관월(館月)로도 적고 관평(館坪)이라 표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달리 오수도찰방터 또는 오수역터라고도 부릅니다.

오수역은 고려시대 남원도(南原道)에 속했는데, 조선시대에 오수도 찰방이 주재하는 본역이 되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역원에는 '오수역: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본도를 찰방하는 속역은 11개소로 창활 동도 응령 인월 잔수 지신 양률 낙수 덕양 익신 섬거 등이 있다. 찰방이 한 사람이다'라고 했고 김개인과 오수 의견 이야기를 따라 실었습니다.

   

내를 건너 옛길을 어림하며 논둑길을 따라 걷다가 관평제 서쪽에서 옛 국도 17호선에 오릅니다. 잠시 신설한 국도 17호선과 나란히 걷다가 덕과면 소재지 방면으로 접어드니 조류인플루엔자 전염을 막는 방제소가 나옵니다. 나쁜 균을 옮길까봐 길바닥에 흘러내린 약물에 발을 토닥여 신발을 적십니다. 문득 일본 여성 2인조 가수 키로로의 '미래(未來)로' 노래의 첫 구절 "발 밑을 보아요 이것이 당신이 걸어갈 길"이라는 노랫말이 떠올라 흥얼거려 봅니다. 세상살이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노동 시간과 효율에 대한 이야기가 연일 나오는 요즘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에 속한 다른 나라들보다 효능이 떨어지니 삶의 질이 낮다는 거지요. 흔히 길 걷기를 세상살이에 비유하곤 합니다.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고도 합니다만, 이제 성장시대의 화두는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때로는 쉬면서 내려다보면 갈 길이 분명하게 보이는데, 우리는 자주 길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환상방랑을 경험하곤 합니다.

다시 고개를 들어 가야 할 길을 바라보고 고갯길을 내려서니 곧장 덕과면소재지인 고정리 월평마을에 듭니다. 덕과 파출소 앞에 빗돌이 하나 있어 살펴보니, 참봉을 지낸 김혁준을 기리는 시혜비입니다. 세운 때를 임술년이라 했으니 진주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던 그해(1862)가 아닌가 여겨집니다만, 그의 행적을 찾을 길이 없어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비를 살피고 나니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해서 마침 남원에서 오는 버스를 타고 오수로 돌아갑니다.

◇덕과에서 길을 잃다

앞서 여정을 마친 월평마을에서 시작해 남원으로 이르는 길에는 새 길벗이 동행합니다. 통영로 상경 길을 같이했던 손홍일님이 오랜만에 나왔고, 우리 연구원의 변종도·최지헌 두 청년이 힘을 보탰습니다. 잠시 빗돌과 학교를 둘러보며 마을 연혁을 살피고 가게에서 막걸리 한 잔씩 나누고는 곧장 길을 나섭니다. 통영별로는 옛 국도 17호선과 비슷한데, 이날은 왠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너무 뻔한 길이라 출발하면서 지도를 한 번 살펴본 뒤에 도로 접어 주머니에 쑤셔넣은 채 나섰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덕과에서 사매에 이르는 길이 국도 17호선의 약간 서쪽으로 설정되어 있어 논길을 걷는다는 것이 엉뚱하게도 동쪽으로 잡아 중화참에는 보절면소재지인 신파리로 들고 말았습니다. 키로로의 노랫말에서 새긴 바도 있었건만, 어쩜 이렇게 황당한 오시범을 보인 것일까요. 역시 세상살이는 만만찮습니다.

전북 남원시 덕과면소재지를 지나는 통영별로. /최헌섭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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