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52) 통영별로 18회 차

11월의 첫 주, 오늘은 해남로와 헤어지는 삼례에서 길을 잡습니다. 서울서 내려오는 여정을 따르다보니 이곳에서는 많은 것들과 헤어지게 됩니다. 이제껏 해남로와 공유했던 길을 나누어 각자의 종착점을 향해 걸어야 합니다. 오늘 여정은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삼례에서 숙소하고 한내 주엽쟁이 가리내 심금정 구경하고 숩정이 공북루 서문을 얼른 지나 남문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소강남(小江南)이로다"라고 한 그 구간을 걸으며, 남원까지는 그와 동행하려 합니다.

삼례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 역원에 "삼례역(參禮驛)은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본도에 속한 역은 열두 개이니, 반석 오원 갈담 소안 재곡 양재 앵곡 거산 천원 영원 부흥 내재가 그것이다. 찰방 1명이다.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병(契安兵)을 피하여 삼례역에 이르렀다"고 실었습니다. 옛 삼례역이 있던 즈음의 옛길을 덮어쓴 길은 지금도 역참로(驛站路)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길은 완주우체국 북쪽 사거리에서 동학로와 교차하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남쪽으로 동학농민길을 따라 그 길이 끝나는 옛 한내(漢川) 즈음에 이르니, 척양척왜 보국안민을 외친 동학농민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비비낙안 飛飛落雁

지금 이곳에는 만경강 생태 환경 탐방로가 개설되어 있고, 그곳을 지나 삼례교를 통해 만경강을 건넙니다. 이 강은 삼례교의 바로 동쪽에서 고산천 소양천 전주천이 모여 만경강을 이루어 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듭니다. 바로 이즈음이 완산팔경의 하나로 꼽히던 비비낙안이 펼쳐지던 곳입니다. 아직은 철이 일러 비비정(飛飛亭) 근처의 강가에 내려앉는 기러기를 제대로 볼 수 없지만, 우리가 길을 걸을 때만해도 평화롭게 먹이 활동을 하던 기러기 몇이 놀라 푸드덕 물을 차고 오르는 정경을 연출해 줍니다.

옛길은 전주천의 서쪽으로 열려 고랑동 평리마을로 이르는데, 지금은 새로 용정∼용진간 도로를 개설하면서 옛길이 끊긴 곳이 있어 잠시 헤맸습니다. 이 길을 지나니 평리로 이르는 옛길이 잘 남아 있어 마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모처럼 평화로운 마음으로 마을의 풍경을 살피며 걷습니다. 마을을 벗어나면, 전주천 둑에 낸 한내로와 만나는 정류소 옆에 '평리 쥐업정'이라 적은 이정표가 서있습니다. 보아하니 이곳이 바로 이몽룡이 지난 주엽쟁이임을 알게 됩니다. 주엽정이는 주엽나무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이 돌은 그 아래의 독다리(돌다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평리의 주엽쟁이 옛길. /최헌섭

가리내를 건너다

평리를 지나 지금의 26번 도로(동부대로)로 이르는 옛길은 세종자동차운전전문학원 서쪽으로 열렸습니다. 옛 선형이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경지 정리가 된 경작지의 경계를 따라 신흥동 고랑리를 지나 신감으로 이른 길을 그려볼 수는 있습니다. 신감을 지나면서 옛길은 지금의 전주제1·2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즈음에서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산이 전주의 진산인 건지산(乾止山)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 산천에 "건지산은 전주부의 북쪽 6리에 있으며, 진산이다. 이규보의 기(記)에 '전주에 건지산이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여 주의 웅진(雄鎭)이다' 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신정일 선생은 <다시쓰는 택리지 2>에서 "건지산은 전주와 같은 고도의 진산으로 보기에 너무 작고 전주 부성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다. 지역의 원로들이나 풍수지리학자 최창조 씨는 조선 왕조의 개창자인 전주 이씨들의 조상 묘(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穆祖의 무덤)가 건지산에 있으므로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기린봉에서 건지산으로 진산을 옮기지 않았겠느냐 추정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위에서 보았듯, 고려 때의 문인 이규보(1168~1241)의 기에 이미 건지산을 주의 웅진이라 했으니 고려 때부터 건지산을 전주의 진산으로 여겨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가리내를 건너기 전의 옛길은 추천 5길-4길-1길로 이어져 가리방죽 동쪽에서 내를 건넙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보가 설치되어 있어 건너기가 만만찮지만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그리로 내를 건넙니다. 보를 통해 내를 건너고 나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보 바로 위쪽에 아담한 정자가 있어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 성종 임금 때 이경동이 낙향하여 낚시로 소일하던 곳인데, 후손들이 정자를 짓고 추천대(楸川臺)라 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가리내를 한자로 추천(楸川)이라 적은 것에 근거하여 근처에 가래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합니다만, 삼천천과 전주천이 합류하는 것을 내가 갈라지는 것으로 보아 가리내라고 한 것은 아닌지 따져 보아야 할 듯합니다. 그것은 추천대가 자리한 장소성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우리 지역의 남강이 낙동강에 드는 곳을 갈음강 또는 기음강(岐音江)이라 하는데서 유사한 용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岐)의 훈이 갈리다 또는 갈림길이니, 기음강이란 이름이 비롯한 바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리내를 건넌 즈음은 고사평(古沙坪)인데, 예전에는 전주천의 보호사면에 발달한 모랫들이었겠지만, 지금은 아파트 공사가 한창입니다. 고사평의 북동쪽의 덕진호는 옛 이름이 덕지(德池)인데, 이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전주의 기운이 서북쪽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고려 때 조성한 인공 연못이라고 합니다. 예로부터 이곳 덕진호의 연꽃은 완산팔경의 하나인 덕진채련(德眞採蓮)이라 할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전주천

전주천이 삼천천과 만나는 이곳 여울목에는 하천 정비와 생태 교육을 위하여 섶다리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섶다리는 섶으로 만든 다리를 이릅니다. 여름이 아닌 건기에 급하게 만들어 쓰는 다리로 어릴 때 우리 마을에도 이런 다리가 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섶다리는 김해시 진영읍 설창리에 둔 신교(薪橋)였습니다. 신교는 한자의 뜻을 빌려 섶다리를 적은 것이고 소리와 뜻을 빌려 적을 때는 삽교(揷橋)라 하며, 섶다리는 삽다리라고도 합니다. 진례에서 한림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는 내를 설창에 둔 섶다리 때문에 신교천(薪橋川)이라 했는데, 지금은 화포천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날 심천과 전주천이 만나는 둔치에는 밴드가 야외공연을 펼치고 있고, 둔치에 난 산책로에는 사람들이 부쩍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시내가 멀지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 아침부터 서두른 길이 오후 2시를 훌쩍 넘겨도 식당을 찾지 못했던 터라 가까운 곳에서 밥집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바람에 재게 걷습니다. 근처 신축 상가에서 아침에 이어 점심도 전주콩나물해장국으로 허기를 달랜 우리는 다시 길을 잡아 나섭니다.

떡전

이곳에서부터 옛 떡전(병점=餠店)이 있던 곳까지는 대체로 지금의 전주천 둑길과 비슷한 선형을 따라 옛길이 열렸으므로 우리는 도로의 소음을 피해 그 아래의 둔치를 따라 걷습니다. 지금 이곳 전주천 둔치는 한창 정비공사가 진행되고 있고, 한쪽에서는 이 공사에 대한 시민 의견을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하천에서 서식하고 있는 수달 등에게 안전한 서식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생태하천을 지향하고 있지만, 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천편일률적인 하천 정비가 오히려 그들의 삶터를 앗아가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듭니다.

떡전이 있던 곳은 지금의 전주 금암동 일원인데, 우리가 중화(中火)를 들고 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만나게 됩니다. 지금 금암동 일원의 거리명 주소에 떡전1~5길을 채용하고 있는 것을 보니 여간 다행스럽지 않습니다. 지금은 가로가 정비되어 옛길도 떡전도 찾을 수 없지만, 백제교 사거리에서 터미널 사거리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헤아려집니다.

   

우리는 그 사이의 징검다리를 건너 전주천동로를 따라 진북초등학교에 이르러 다시 옛길을 찾습니다. 이 학교의 동남쪽 숲정이 성지 동남쪽 모퉁이에서 객사1길로 이어지는 가로에 북서-남동 향의 옛길이 잘 남아 있습니다. 옛길이 잘 남아 있는 들머리의 숲정이는 숲머리라고도 하는데,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는 임촌(林村)이라 적어 두었습니다. 원래 이곳은 군사 훈련장으로 쓰이다가 중죄인 처형장이 되기도 한 곳입니다. 이곳을 숲정이 성지라 하는 것은 신유박해(1801년) 이래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장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걷는 길은 보람이 있습니다. 같이 도반(道伴)이 돼서 걸으시고 싶은 분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제 손전화는 010-8519-5240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