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서갑철 예비사회적 기업 (유)마루 운영자

자활공동체, 주변에서 익숙하게 듣지만 무엇을 하는 곳인지, 누가 그곳에서 일하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적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이들은 묵묵히 '자활'을 꿈꾸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를 둔 서갑철(42) 씨도 그런 사람이다.

행정기관이나 자활센터, 혹은 동 주민들에게 서 씨는 창원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자활'을 수행하는 이로 손꼽힌다. 그는 현재 창원시 성산구 사파동 경남고용복지센터가 운영하는 창원지역자활센터 사무실에 다니고 있다. 또한 지난해 10월부터 경남도 예비사회적 기업에 선정된 (유)마루를 책임지고 운영하고 있다. 마루는 자활센터 사무실 지하 1층에 자리하고 있다.

그가 주로 일하는 예비사회적 기업 (유)마루는 크게 학교 재활용 수거와 관리 사업, 찬누리공방 운영 등을 한다. 기존 학교 사업만 국한하던 것을 지난해 10월 예비사회적 기업이 되면서 추가된 사업이 찬누리공방이다. 찬누리공방에서는 생활복, 방석·등받이 등 각종 생활 소품을 직접 제작해 팔며, 재봉과 홈패션 교육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주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서갑철 씨가 찬누리공방에서 만든 생활복을 소개하고 있다. /이시우 기자

서 씨가 자활센터에 발을 디딘 것은 2008년 2월이었다. 그때 그에게는 7살 된 아들이 있었다. 시련의 시작은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2002년 12월 아내와 이혼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겨우 10개월이던 아들을 그가 맡았다. 어떻게든 아들을 키우고자 여관방을 전전하며 건설현장 막노동, 정수기 사업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돈은 쉽게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서 씨는 "고정적인 일자리가 없는데다 아이까지 있으니 여관에서 방을 월세로 주지 않았다. 한 여관에서는 하루 2만 원씩 돈을 내고 살아야 했다. 버는 돈도 적었지만 이렇게 방세로 많이 나가니 아이 우윳값과 밥값 하면 남는 게 없었다"고 했다.

창원지역자활센터 행복한 가게 앞에 서있는 서갑철 씨.

어린이집 24시간 돌봄 반에 아들을 맡기며 몸 돌보지 않고 일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는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며 창원시 사회복지과를 찾아가 일자리 주선을 요청했다. 한부모가정 가장인데다 기초수급권자였던 그에게 시청 직원은 STX조선 내 하청 협력업체 사장 한 명을 소개해줬다. 이 업체 사장은 일은 다소 고되지만 월 200만∼250만 원을 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일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인생의 달콤함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입사하고자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검진 결과 허리디스크에 따른 근골격계 질환자로 판정났다. 결국 입사를 포기했다. 막막함은 다시 그의 눈앞에 버텨 섰다.

찬누리공방에서 재봉 수업이 한창이다.

아들을 위해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창원시 사회복지과로 찾아갔다. 사회복지과에서 이때 소개해준 곳이 창원지역자활센터였다.

2008년 2월부터 창원지역자활센터 재활용사업단에 들어가 처음에는 학교 의자와 책상을 수리하는 업무를 했다. 하지만 수요가 너무 적어 돈벌이로는 여의치 않았다고 했다. 그때 그가 받은 월급(최소 생계비)은 70여만 원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사업을 확장하자고 했다. 우선 학교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재분리해 재활용품과 쓰레기로 나누고, 종이류 같은 재활용품은 내다 팔고, 쓸만한 것은 수리해 팔았다.

예전 학교 '주사' 업무였던 화단 가꾸기, 나뭇가지 치기, 배수로 정비 등으로 점차 일을 확대했다. 대상 학교도 25개 교로 늘었다.

보건복지부 '자활사업'에서 2012년 초 고용노동부 '자활공동체'로 이름을 바꿨다. 월급도 130만 원으로 다소 올랐다. 그해 10월 이 자활공동체는 경남도 예비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됐다. 지금은 160만여 원을 월급으로 받는다.

찬누리공방에 전시된 각종 생활 소품들.

그는 마루를 사회적 기업으로 키우는 게 꿈이다. 마루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자활 수단도 되지만 형편이 더 나아지면 각종 사회공헌사업도 하려고 했다. 지금도 몇몇 학교 학생에게 장학금을 준다. 하지만 그는 소박하지만 더 큰 꿈이 있다고 했다.

"이혼 직후 15일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온종일 아이를 돌봤다. 돈도 없어 넉넉하지 않았지만 내 아이에게 우유 먹이고, 잠재웠던 그 시간, 그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다. 내게 그런 기쁨을 준 아들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해 하루빨리 기초수급권자를 벗어나 떳떳한 아빠, 노력하는 아빠가 되고 싶다. 그리고 예비사회적 기업을 키워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하는 것도 최근 일본 견학 뒤 세운 새로운 포부다."

이혼 뒤 아이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던 그. 그런 그가 이제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꿈꾸는 '사회적 일꾼'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또한 늘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일 잘하는 밝은 '애 아빠'라는 주변인 평가도 덤으로 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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