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지역 봉직…적금통장 하나없이 '이웃 위한 삶' 향년 78세

송윤도(1936~2013) 씨가 지난 15일 오후 9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세.

갑작스러운 이별에 유족(송철식·송철환·송철민·송철균·송철훈·송철규·송미숙·송미연)은 물론, 지인들도 슬픔에 빠졌다.

"5년 전 두 차례에 걸쳐 심장수술을 받으셨지만, 건강에 큰 문제는 없었어요. 하지만, 최근에 온 급성폐렴 때문인 듯합니다."

양덕여중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장남 송철식(54) 씨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인은 통영시 사량면에서 6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방이 바다인 아름다운 섬마을. 장대로 고기를 잡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통영 바다 곁에서 자랐다. 고인이 평생 터 잡고 살았던 마산과는 마산 육군병원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1960년 24살이 되던 해 아내 천봉순(75) 씨와 결혼해 슬하에 6남 2녀를 뒀다.

"돌이켜보면 평생 베풀며 사셨어요. 쌀 한 톨, 돈 십 원, 당신보다 이웃을 항상 생각하셨죠." 큰아들 철식 씨가 회상했다.

고인은 지방자치단체 행정 일을 천직으로 삼았다. 동 서기와 일반 행정직을 거쳐 37살 되던 1973년부터 동장을 맡았다. 고인이 거쳐 간 동만 해도 9곳이나 된다. 삼귀동, 의창동, 반월동, 월영2동, 추산동, 회원2동, 석전1동, 가포동, 월영1동을 거쳤다. 3·15 의거가 일어났던 때에도 마산에 있었고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던 1979년에는 월영2동 동장을 맡고 있었다. 지방의회가 부활된 1991년에는 회원2동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해 부의장까지 지냈다. 모든 일을 내려놓은 후에는 다시 한번 지역을 위해 힘썼다. 젊었을 적 잠시 했던 대서 일과 틈틈이 강의를 나가며 평생 쌓아온 행정 노하우를 지역민들과 나눴다. 마산의 근대 행정 역사 한 편을 장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권력에 기대는 일은 없었다. 평생 공직 생활을 하면서도 늘 낮은 자세로 살았다.

   

"아버지는 늘 변두리만 도셨어요. 동장으로 있었던 곳만 봐도 주로 외곽지역, 당시에 굉장히 가난했던 지역이 대부분이죠. 아버지가 석전동에 계실 때, 하루는 국회의원들이 찾아와 동사무소 한편에 사무실을 차리려 했었대요. 아버지는 극구 반대하시며 막아내셨죠. 동사무소는 주민들 것이지, 특정 권력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는 신념이 확고하셨기 때문이죠."

갖은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서민을 향한 마음만큼은 변치 않았던 고인을 떠올리며 철식 씨가 말했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시의원 출마 시에는 타 후보들과 엄청난 표 차이를 보이며 당선됐다. 주민을 위한 진정한 일꾼을 주민들이 정확히 알아본 셈이다.

재산 욕심도 없었다. 돈을 모으는 재주를 키우는 대신, 나눔이 주는 기쁨을 안았다.

사촌처남 천익수(69) 씨는 "살면서 적금 통장 하나 없는 분이셨어요. 돈 모을 틈도 없었지. 쌀 가게가 어렵다면 당신 돈으로 사고, 또 나눠주고. 어렵다 하는 집은 빠짐없이 찾아갔어요"라고 전하며 살아생전 고인의 모습을 되새겼다.

엄격했던 당신 생활과는 달리 자식들에게는 개방적이었던 고 송윤도 씨. 현재 장남 철식 씨는 음악교사직과 겸해 작곡을 하고 있으며, 넷째 철민(45) 씨는 국악관현악단 '휴' 대표로 있다. 다섯째 철훈(40) 씨 역시 피리에 일가견이 있는 음악인이었고, 막내 철규(33) 씨는 경북도립국악단 단원으로 있다. 작은 취미로 음악을 곁에 두었던 고인의 삶과 개방적인 교육관을 자식들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당시 음악에 빠지기만 해도 온 집안이 난리였죠. 하지만 아버지는 장남인 제가 음악을 해도 묵묵히 믿고 지켜봐 주셨죠. 사람을 좋아하고 항상 밝으셔서 저희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죠."

고 송윤도 씨의 따스했던 삶을 잊지 않고, 어느새 백발이 된 옛 회원2동 주민들도 고인을 찾아왔다. '내 평생 가장 따뜻했던 동장님'이라며 연방 '고마웠다'는 말을 나지막이 내뱉는 그들에게도 '떠난 이의 향기'는 깊게 배어 있었다.

"정말 정직했어요. 우리 애들 돈 십 원 안주고 남 주는 사람이었어. 성질이 그랬으니까. 배고프고 어려운 사람 있으면 참지를 못해. 그래도 나는 잘했다 했어요. 지금 와서도 보니 어쨌든 잘했소. 정말 잘했소."

고인을 먼저 떠나보낸 아내 천봉순 씨가 되뇌었다. 천 씨의 말 속에도, 고인을 찾는 지인들 가슴에도 고 송윤도 씨는 자랑스럽고 정이 많았던 '영원한 동장'으로 남을 것이다.

한편 고인은 2009년 12월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와 인터뷰에서 부마항쟁의 발생 원인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근본적인 원인은 박정희한테 있었다고 단언하고 싶어요. 장기집권이 아니라 종신 대통령을 하려는 박정희의 정치적인 욕망이 부마사태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박정희가 만든 유신헌법에 의하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 유신헌법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법이죠. 유신헌법에 국회의원 삼분의 일을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되어 있었고,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의 유신헌법이란 입법부도 대통령이 장악하고 사법부도 전부 자기가 임명하고 행정부까지 해서 삼권을 모두 장악했어요. 그래서 뜻있는 교수나 시민들이 일어선 것 아니겠습니까?" (부마항쟁 증언집-마산편, 296쪽)

빈소는 창원 삼성병원 영안실 VIP 1호실에 차렸으며, 발인은 18일 오전 6시 30분. 장지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화장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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