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염원' 최태평 설화 담아…고려시대 중엽 양식 잘 살려

지난 여정을 마친 죽산 봉업사 터에서 비석거리를 향해 1km 정도를 걸으면, 태평원이 있던 미륵당에 듭니다.

이곳 미륵당에는 매산리 석불입상 또는 태평미륵이라 불리는 큰 돌미륵이 길 가는 나그네를 불러 세웁니다. 높이 5.7m에 이르는 거불이며, 머리에 쓴 보관(寶冠)을 제외한 몸통은 한 덩이의 화강암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거불은 양식적으로 논산의 개태사(開泰寺:940년 준공) 석조삼존불상(보물 제219호)을 계승한 것으로, 고려시대에 충청도·경기도 일대에서 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석불과 비슷한 유형으로는 논산 관촉사(觀燭寺)와 부여 대조사(大鳥寺)의 석조보살입상을 견주어 볼 만합니다. 이 불상은 앞의 두 작품에 비해 크기가 작고 옷 주름 등의 표현이 더욱 형식화되었으며 조각 수법도 거칠어 고려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이 석불의 건립 시기에 대한 다양한 설화가 전합니다.

몽고군이 침입해 왔을 때에 이곳 죽주산성에서 몽고군을 물리친 송문주와 처인성에서 살리타이를 죽인 김윤후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 무렵에 세웠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조선 영조 임금 때 이 지역에 살던 최태평(崔太平)이란 부자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빈민 구제와 호국의 염원을 담아 건립했다는 설이 있어 조선시대 후기 작품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태평 관련 설화와 이 불상을 태평미륵이라 하는 것은 이곳에 있던 태평원(太平院)에서 비롯하여 덧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죽산현 역원에 '태평원은 현 동쪽 5리 되는 곳에 있다'고 했으며, 같은 책 고적에 '죽주고성(竹州古城)은 현 동쪽 5리 되는 태평원 북쪽에 있다'고 한 사실(史實)이 그 예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태평 관련설은 태평원에 빌붙어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여겨지며, 그 양식은 고려시대 중엽에 만들어진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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