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22) 주흘관서 새재까지

지난 여정은 조령진의 제1관문인 주흘관에 들어 최명길 설화를 품은 성황사에서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니 새재를 넘는 통영로는 이번 여정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셈입니다. 오늘은 선정비군-지름틀바위-원터-용추-교귀정-타루비-이깃소-꾸구리바위-산불됴심비-조곡관으로 이르는 길을 따라 걷습니다.

성황사를 지나 드라마 <태조 왕건>을 찍었던 세트장 입구에는 20여 기의 선정비가 길가에 도열하듯 늘어서 있습니다. 이것들은 문경 현감과 경상도 관찰사 등의 선정비로 원래는 문경현 관아와 상리 비석거리 등에 흩어져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합니다.

이곳에 세워진 비석 하나하나를 살피고 지나면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와 머물렀다는 혜국사(慧國寺)로 이르는 갈림길을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부터는 드라마 촬영장을 보고 나온 인파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길에는 사람이 미어져나갈 지경입니다. 조류에 휩쓸리듯 사람의 물결에 섞여 옛길을 걷자 하니 이곳이 옛길인지 저자거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로 지경입니다.

   
 

길가의 낙동강 발원지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내에는 그런 물에서만 자랄 수 있는 물고기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서도 여전히 놀이 공원에서나 하던 작태를 보입니다. 누군가 던진 과자에 고기가 모여들자 애 어른 할 것 없이 괴성을 내지르고, 너도나도 과자부스러기를 던져댑니다.

왁자한 인파를 헤치고 걸음을 재게 걸어 원터로 향하다 보면, 가까운 길가 암벽에는 상주목사 이익저(李益著)와 문경현감 구명규(具命奎)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마애비가 나옵니다. 예서 조금 더 걸어 길이 꺾이는 곳에는 이곳에서 골맥이 서낭당이라고도 하는 조산(造山)이 있고 그 위쪽에는 화강암의 절리에 의해 지름틀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를 지나면 머잖은 곳에서 원터가 나옵니다. 이곳의 원집은 안내판에 조령원이라 했지만, 관련 자료를 뒤져보니 동화원(桐華院) 자리로 보아야 옳을 듯싶습니다.

원터에서 용추로 오르는 길가에는 1993년까지 장사를 했다는 주막이 있습니다. 마침 우리가 이곳을 지날 때는 한창 떡메를 쳐서 인절미를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주막다운 정서를 느낄 수는 없지만 사람을 붙잡는 인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주막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몸통에 'V'자형으로 상처 난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됩니다. 팻말에는 일제 말기에 송진을 채취한 자국이라 적었습니다. 이것은 팻말에 이른 대로 진주만 급습 후 연료 공급이 끊긴 일제가 송탄유(松炭油)를 만들기 위해 저지른 만행의 흔적입니다. 김천 직지사와 언양 석남사 등 오래된 소나무가 많이 자라는 사찰 입구에서 이런 흔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원터와 조곡관 사이에 있는 용추는 뛰어난 경승으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입니다. 용추는 달리 팔왕(八王) 폭포라고도 하는데, 하늘과 땅의 모든 신인 팔왕과 선녀들이 어울려 놀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새재 아래 동화원 서북쪽 1리에 있다. 폭포가 있는데 사면과 밑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한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용이 앉았던 자리와 구지정(具志禎)이 숙종 25년(1699)에 새긴 '용추(龍湫)'라는 글씨가 있습니다. 이곳의 용추는 상초리뿐만 아니라 인근의 주민들이 무제(기우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한데, 그것은 용이 물을 다스린다는 믿음에 따른 것입니다.

이곳에 이르러 용추 샘 맑은 물을 가까이하니, 문득 화끈거리는 발바닥에 휴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솟습니다. 우리 일행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는 격으로 용추 샘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탁족(濯足)을 즐기지만, 그 서늘함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양광에 따뜻하게 데워진 바위로 올라섭니다.

용추 바로 옆에는 교구정이 있습니다. 정자의 이름은 신구(新舊) 경상감사가 관인을 교환하던 곳이라 교귀정(交龜亭)이라 했습니다. 교귀정은 새재 아래에 둔 첫 관문인 조곡관보다 약 200년 앞선 1470년께에 문경현감 신승명(愼承命)이 건립한 것으로 전하며, 1896년의 항일의병전쟁 때 불에 탄 채 방치되던 것을 1999년에 다시 세워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교귀정 바로 아래쪽 절벽에는 현감 이인면의 선정비와 애휼비가 마애비의 형식으로 새겨져 있고, 게서 조금 더 위쪽에는 고안동부사김상국정문공수근추사타루비(故安東府使金相國正文公洙根追思墮淚碑)가 나옵니다.

타루비(墮淚碑)란 옛날 진나라 양양 사람들이 고을 원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푼 양고(羊枯)를 생각하여 그 비를 보기만 하면 눈물을 흘렸다는 옛 일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 빗돌은 그가 안동부사로 재임할 때 베푼 선정을 기려 철종 6년(1855)에 안동 38방의 백성들이 세운 것인데, 뚜껑과 몸통에는 한국전쟁 때 생긴 총탄 자국이 남아 있어 그날의 비극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바로 위쪽으로는 이무기가 살았다고 전하는 이깃소와 젊은 새댁이나 여인이 지나면 희롱을 일삼는 꾸구리가 살았다는 꾸구리바위가 있는 계곡이 나옵니다. 조곡관에 이르는 길가에는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전하는 '산불됴심' 빗돌이 있고, 바로 그 위쪽에는 최근에 물을 끌어올려 만든 조곡폭포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응암에 이르는 길가 바위 절벽에는 착암기로 바위를 뚫은 흔적이 드러나 있는데, 그것은 20세기 이후에 옛길을 크게 넓힌 증거입니다.

조곡관 들머리의 응암(鷹巖)에는 6기의 마애비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에는 새긴 글자를 쪼아낸 것과 거제부사 오수인(吳守仁)의 선정비가 포함되어 있어 그 배경이 궁금해집니다. 이지러진 도로 모습과 마애비가 가진 궁금증을 품은 채 조곡관에 들어 오늘의 여정을 접습니다.

1·2 관문 사이 '원터'…알고보니 옛 동화원

원(院)은 고려시대 이래로 출장 관원을 위해 교통의 요충지와 인가가 드문 곳에 둔 숙박시설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원은 공무 수행자가 묵기도 했으나 대부분 장사치나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장소로 쓰였습니다.

제1관문과 제2관문 사이의 원터 앞 안내문에는 이곳을 조령원(鳥嶺院)이라 명기하였지만, 옛 지지에 조령원은 조령의 동쪽에 있다고 했으니 이곳이 조령원인지는 다시 살펴보아야 할 듯 싶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 산천에 "조령은 현의 서쪽 27리, 연풍현의 경계에 있다"고 나오며, 같은 책 역원에는 조령원은 "새재의 고개 동쪽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조령원은 충청도 연풍과 경계를 이루는 새재 동쪽에 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면 이 원은 새재 안에 있던 조령원, 동화원(桐華院)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 더 살펴보겠습니다. 〈앞의 책〉에 동화원은 현의 서북쪽 15리에 있다고 했고, 또한 교귀정(交龜亭) 가까이에 있는 용추(龍湫)가 "새재 밑의 동화원 서북쪽 1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이로써 위치를 헤아리는 기준이 되는 문경현과 용추에서의 방향과 거리로 헤아릴 때 이 원은 동화원으로 보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두 차례에 걸쳐 발굴된 원터의 상층 건물지에서 고려시대 온돌(溫突) 자리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여기에 원을 두고 새재를 교통로로 이용한 때가 새재의 개통 시기라 알려진 조선 태종 14년(1414) 이전부터 지속되었음을 일러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입니다.

원의 바깥으로는 돌로 담장을 둘러 방비를 튼튼히 하였습니다. 바깥 담장은 곧게 쌓아 쉬이 넘을 수 없게 하였고, 안쪽 담장은 계단식으로 처리하여 마치 읍성의 축소판으로 보입니다. 원터의 뒤쪽으로는 망치등이라 불리는 능선이 뻗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그 생김새가 망치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지만, 그 자리에 봉수대가 있으니 망보는 고개란 의미의 망치(望峙)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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