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13) 경북 성주읍성∼의마총

임진년 첫 나들이로 인사드립니다. 올해를 흑룡(黑龍)이라 하는데 이는 십간의 임계(壬癸)가 오방 중 북방 흑색을 상징하는 용의 해이기 때문입니다. 흑룡은 지혜를 상징한다 했으니, 그 지혜를 빌려 올 한 해 어렵고 힘든 일들 잘 풀어 나가시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

오늘은 성주읍성에서 길을 잡아 나섭니다. <여지도서>에 그려진 옛길은 읍성 남문을 나와 향교 서쪽으로 길을 잡아 부상역에 이르는데, 향교의 남쪽에 다층탑이 그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동방사 터에 남아 있는 7층 석탑으로, 원래는 9층이었다고 전합니다.

성주읍 예산리 동방사지 석탑

◇동방사지(東方寺址) 석탑 = 절터는 성주읍에서 왜관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약 1㎞ 떨어진 도로변에 있습니다. 동방사는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석탑만 남아 옛 길손들에게 랜드마크로 구실해 왔습니다. 기단의 네 면과 탑신의 몸돌에 기둥을 새겼으며, 특히 1층 몸돌에는 문을 깊게 새겼습니다. 1·2·3층 지붕돌 네 귀퉁이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자유로운 조각 양식이 엿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동방사는 불교 전성기인 통일신라 후기에 행정중심지에 대가람을 건립한 것이라 전합니다. 탑에는 풍수비보와 관련된 배경이 전해져 옵니다. 성주는 지형이 소가 누워 별을 바라보는 상이라 하며, 동남으로 성산, 서는 풍두산, 북으로는 다람쥐재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천(伊川)이 동쪽으로 빠지고 있어 성주의 지기가 냇물과 같이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고 하여 지기탑(地氣塔)이라고도 합니다.

탑거리에서 성주향교를 지나 서쪽으로 길을 잡아 905번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5리쯤 가면 한강 정구 선생의 묘소가 있는 금산리에 닿습니다.

◇한강 정구(鄭逑) 선생 묘소 = 처음에는 성주군 수륜면 수성동 창평산에 있었으나 1663년(현종 4년)에 지금의 성주읍 금산동 인현산 자락으로 이장했습니다. 선생은 1543년(중종 38년)에 대가면 칠봉동 유촌(柳村)에서 태어나 78세인 1620년(광해군 12년)에 팔거현 사양정사(泗陽精舍 : 대구시 칠곡 사수동)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는 도가(道可)이고 호는 한강(寒岡)이며 본관은 청주인데, 22세에 과거보러 상경한 적이 있었으나 느낀 바 있어 과장에 들지 않고 귀향하여 학문에만 정진하였습니다. 선생은 당시 영남 좌·우도에서 쌍벽을 이루던 퇴계(退溪)와 남명(南冥) 두 스승을 찾아 배움을 청했습니다. 여러 번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사양하다가 38세이던 1580년(선조 13년)에 창녕(昌寧) 현감으로 부임하여 1년 반 동안 선정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질 정도였습니다.

선생은 우리 지역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최초의 관직 생활인 창녕 현감을 역임하고 얼마 뒤 함안군수를 지냈습니다. 이때 부임지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창산지(昌山志)와 함주지(咸州志)를 펴내셨으니 여기서 읍지 편찬의 역사가 비롯하였습니다. 사후에는 창녕 관산, 창원 회원, 언양 반구, 함안 도림서원에 향사되었습니다.

무덤에 참례하고 북쪽으로 5리 쯤 가면 답계역이 있던 학산리 댁기마을을 지나게 됩니다. 지금은 905번 지방도를 따르지만 답계역의 위치로 볼 때 전통시대의 도로는 조금 더 동쪽으로 열렸던 것 같습니다.

<여지도서>의 성주 지도.

◇답계역(踏溪驛) = 답계역이 있던 댁기는 답계를 그리 불러 온 듯합니다. <여지도서> 성주 역원에 "답계역은 관아의 북쪽 10리에 있다. 북쪽으로 개령 부상역까지 30리이다"라고 나옵니다. 이곳 답계역은 점필재 김종직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 동기를 부여받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종직(金宗直 : 1431~1492)이 아버지 김숙자(1389~1456)의 시묘 살이를 하던 중 정축년(세조3년, 1457) 10월 어느 날 밀성(밀양)에서 경산을 거쳐 답계역(성주)에서 잤습니다. 그때 꿈에 신령이 나타나 "나는 초나라 회왕(懷王 : 의제)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 :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에 버려졌다" 말하고 사라졌습니다. 김종직은 이를 바탕으로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누군들 그것이 훗날 무오사화(戊午士禍 : 1498)라는 피바람을 불러 올 줄 알았겠습니까.

◇대야현(大也峴) = <대동여지도> 17-3에는 성주 북쪽에서 진산인 인현산(印懸山) 서쪽 고개를 넘는 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고개가 <여지도서> 성주 도로에 실린 대야현입니다. 책에서는 성주 북쪽 10리라 했으니 지금의 대티고개를 이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티고개에서 남북쪽을 살피면, 성주의 대표 농산물인 참외를 재배하는 하우스단지의 은빛 물결이 눈에 가득 듭니다. 지금 하우스 안에는 올 봄에 출하될 참외가 한창 자라고 있을 테지요. 참외는 성주군의 주력 상품으로 전국 생산량의 70~80%를 차지한다고 하니 가히 성주를 참외의 고장이라 할 만합니다.

◇의마총(義馬塚) = 대티고개를 내려서면 초전면 소재지인 대장리 대매(대마를 이곳에서 그리 부름)마을에 듭니다. 이곳은 옛 대마점(大馬店) 혹은 대마 객점이 있던 곳으로 주인을 살린 의로운 말의 무덤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여지도서> 성주 고적 신증에 "의마총은 관아의 북쪽 15리에 있다. 답계역졸 김계백이 말을 기르던 역에서 털빛이 붉은 말을 탄지 5~6년이 되었다. 영조 무진년(1748) 8월 어느 날 김계백이 부상(扶桑)에 끌고 갔다가 술에 취해 말을 타고 밤중에 돌아오는데, 큰 호랑이와 마주쳐 말 아래로 떨어졌다. 호랑이가 곧장 뛰어들어서 물려고 했다. 이에 김계백이 타던 말이 갈기를 흔들며 길게 소리 내어 울고, 발굽으로 밟거나 입으로 깨물며 호랑이가 주인을 해치지 못하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물러나며 10여 리를 가서 대마 객점에 이르렀다가 쓰러져 일어나지를 못했다. 역리와 역졸들이 객점 앞에 말을 묻고 비석을 세웠다"고 나옵니다.

▲ 대티고개에서 본 초전면 대마평 일대. 멀리 참외 하우스가 즐비하다.

이 일대를 <대동여지도> 16-3에는 대마평(大馬坪)이라 적었는데 대마점 혹은 대마 객점에서 비롯한 이름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객점도 의마총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다만 마을 이름에서 옛 자취를 더듬어 볼 뿐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남원 오수역과 밀양 개고개의 의견(義犬) 설화에도 전해져 오는데, 짐승들이 불을 막고 호랑이에 맞서게 된 빌미는 모두 주인의 지나친 음주에 두어져 있습니다. 새해 금주 혹은 절주 계획 세우신 분들께서는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글·사진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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