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9) 우포(牛浦)·누포(漏浦)를 지나다

낙동강을 건넌 옛 웃개나루터에서 길을 잡아 나섭니다. 보름 만에 길에 서니 풍경이 많이 변해 있습니다. 들판은 보기 좋게 황금색으로 물들었고, 가을걷이를 하고 있는 농부들의 힘찬 모습에서 활력을 얻습니다.

◇웃개나루에서 우포 가는 길 = 낙동강을 두고 창녕과 함안을 잇는 길은 군사로(軍事路)와 행정로(行政路)가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 지도 대부분에서는 군현을 잇는 후자의 길 위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에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대동여지도>보다 한 세기 앞서는 <해동지도>에는 거주지를 잇는 길이 중심입니다. 이에 근거하면, 낙동강을 건너 영산으로 이르는 길은 도천을 두고 그 앞과 뒤로 가는 길로 나뉘어 있습니다. 뒷길은 영포역~밀포~오호리를 잇는데, 바로 4대강 사업 구간의 함안·창녕보가 들어선 곳입니다.

보의 이름을 두고 두 지역 간에 실랑이가 있었는데 역사성을 고려했다면 밀포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앞길은 웃개나루를 건넌 길과 쇠나리(송진 : 松津)를 건넌 길이 나루가 있던 송진 북쪽에서 만나 영산으로 이릅니다. 도천천을 따라 영산으로 이르는 선형을 띠고 있어 대체로 지금의 국도 5호선과 비슷합니다.

낙동강가에서 본 쇠나리와 토고개 일원. /최헌섭 원장

◇쇠나리 = 쇠나리가 있던 송진리에는 고개랄 것도 없으리만치 낮은 토고개(토현 : 土峴)가 있는데 이곳으로 영산으로 이르는 관도가 열렸습니다. 마을 이름이 된 송진은 고개 서남쪽에 있던 쇠나리에서 비롯했는데, 금진(金津)이라 적기도 했습니다. <해동지도>의 칠원현 지도에는 금진이라 적혀 있습니다. 동쪽을 뜻하는 우리말 살·사라·새를 적기 위해 쇠 금(金) 소나무 송(松)을 빌린 것이니 송진이든 금진이든 그것은 쇠(소)나리인 것입니다. 일대에서 큰 나루였던 웃개나루(상포 또는 우질포)의 동쪽에 있는 나루라 그리 불렀을 것입니다.

나루가 있던 곳은 지금은 4대강 사업으로 뜯겨나간 송진 1구(옛 창마)가 있던 구릉 아래 냇가입니다. 이곳에 나루를 둔 것은 큰물을 피할 수 있는 작은 구릉이 있고 계성천이 낙동강으로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나루는 <여지도서> 산천 신증에 처음 실린 것으로 보아 이즈음에 밀포에 있던 조창이 이리로 옮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해동지도>에는 쇠나리에 진선(津船)이 있다고 했습니다.

관음사 3층 석탑. /최헌섭 원장

◇관음사 = 쇠나리를 지나 토고개를 지고 도는 좌복산 구릉에는 세운 지 오래지 않은 것 같은 관음사가 있습니다. 이곳에 일제강점기 도천면과 부곡면에서 모아 온 여러 불교 문화재가 있습니다. 먼저 삼층석탑이 눈에 띕니다. 임진왜란 때 폐사된 송진리의 보광사지에서 옮겨 온 것으로 규모가 작아지고 지붕돌의 층급 받침의 수가 간략화된 점으로 보아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헤아려집니다. 미륵존마애불상은 한국전쟁 때 건물이 불타면서 중간에 균열이 가는 해를 입었습니다. 그 뒤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68년에 파내어 지금 자리에 모셨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화사석이 특이한 석등이 있는데, 보광사지에서 발견된 것을 1928년에 옮겨왔습니다. 또한 요사채 담장 밑에는 1920년 부곡면 청암리 골짜기에서 일본인 고가 시게루가 반출했던 석종형 부도 1기가 옮겨져 있습니다.

◇영산가는 길 = 고지도에 묘사된 옛길은 도천천의 서쪽으로 열렸습니다. 옛길을 헤아리는 지표가 되는 것은 연지(硯池 : <대동여지도>에는 천연(穿淵)으로 나옴)와 소산(所山) 봉수입니다. 도천천을 따라 북쪽으로 이르던 길은 도천 윗주막골을 지나 연지를 돌아 서쪽으로 듭니다. <해동지도>에는 바로 이 윗주막골과 연지의 서쪽 신제리에 신제(新堤 : 지금의 새못)라는 못이 있고, 그 북쪽 봉산리 배후 구릉에 소산 봉수가 있습니다. 마을 이름을 지금은 한자로 봉산리(鳳山里)라 적지만, 소산 봉수에서 비롯하였으니 봉산리(烽山里)라 적음이 옳아 보입니다. 소산 봉수를 봉산(烽山) 봉수라고도 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해동지도>를 비롯하여 <영산현지도>와 <대동여지도>에는 영산을 지나는 길은 연지에서 서쪽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계성면 명리에 있던 일문역(一門驛) 아래의 일문제(一門堤 : 지금의 고지소류지)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서쪽의 속사고개를 넘습니다.

   
 

◇우포(牛浦)·누포(漏浦)가는 길 = 일문역을 지난 길은 여통산(餘通山) 봉수대 동쪽의 여통고개(餘通峴)를 넘어 창녕 경계에 듭니다. 지금은 남통고개라 하는데, 여통과 통하는 것은 여(餘)의 뜻이 '남다'이기 때문입니다. 옛적에는 이곳이 창녕과 영산의 경계였는데, 여초리 지경(地境) 마을에 이름으로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해동지도>를 보면, 예서 창녕 읍내까지는 고개 셋과 내 셋을 넘고 건너야 합니다. <대동여지도>에는 창녕에서 토천(兎川 : 지금의 토평천)을 건너 맥산(麥山 :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맥산(모산)) 남쪽에서 갈림길을 만나는데, 예서 함안 도흥진에서 낙동강을 건너 곧바로 온 지름길을 만나 누포를 서쪽에 두고 북쪽으로 향합니다.

장기리를 지나 대합면 소재지에 이르면, 서북쪽 태백산(太白山 : 합산(合山)이라고도 함)에 봉수가 있어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일러줍니다. 산의 남쪽에는 사창이 있었고, 예서 대티(大峙)를 넘어 현풍 경계 즈음에서 대견원(大見院)이 있던 대견리에 이릅니다. 남북으로 곧게 설정된 이 길은 임진왜란 때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진이 부산~김해~창원∼영산~창녕~현풍을 거쳐 성주성으로 진격한 길과 비슷합니다. 이렇듯 평화가 깃들 때 문화 전파로로 기능하던 길은 전란을 만나면 처절한 살육의 길이 되기도 한다는 교훈을 새기며 오늘은 예서 마감합니다.

 

   
 
  1872년에 제작된 <창녕지도>의 우포 일원.  

우포(牛浦)·누포(漏浦)

<해동지도 -창녕현->에는 우포 일원이 미구지(尾仇池), 사지지(沙旨池)라 나오며, <조선후기지방지도 -창녕->에는 목포(木浦), 우포(牛浦), 사포(沙浦)로 ,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는 누포(漏浦)로 나오는데 대체로 지금의 우포 일원과 같습니다. 누포의 샐 루(漏)는 동쪽을 뜻하는 '살' 또는 '사라'를 적기 위해 한자를 빌려 적은 것이니, '쇠' '새'를 적기 위해 쇠 우(牛)자를 써서 우포(牛浦)라 적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낙동강의 동쪽에 있는 큰 늪이라 그리 적은 것입니다. 이 늪의 이름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소벌 또는 쇠벌이라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우리말을 말살하기 위해 우포라 적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2008년 치른 람사르총회 전에 이 지역의 환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흔적이니 원래 이름인 쇠벌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에 만든 조선시대 고지도에 우포라는 이름이 실려 있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엉터리로 고쳐진 지명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무조건 그 시절에 혐의를 두는 것 또한 경솔한 게지요.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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