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8) 칠원읍성∼경양대·웃개나루

백혜숙님의 차량봉사로 칠원까지 이동하여 조규탁 님과 길을 나섭니다. 마침 떠난 날이 칠원 장날(3·8일)이라 일찍 문을 연 장터국밥집에서 돼지 수육에 막걸리 한 잔을 연료 삼아 힘찬 출발을 합니다. 왁자한 장터를 빠져나오면 칠원초등학교 북동쪽 외곽에서 칠원읍성의 북성벽을 마주하게 됩니다. 성벽은 근처에서 쉽게 구해지는 혈암을 두부처럼 반듯하게 잘라 벽돌 쌓기를 하듯 줄눈을 맞춰 잘 쌓았습니다. 하지만 성벽이 밖으로 불거져 나와 그대로 두었다간 머잖아 무너져 내리고 말 것 같습니다.

◇칠원읍성(漆原邑城) = 칠원읍성은 임진왜란 100년 전인 조선 성종 23년(1492) 12월에 완성됐는데, 당시 규모는 높이 11자에 둘레 1660자였습니다. 뒤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 칠원현 성곽에는 둘레가 1595자라 했고, 그 뒤 지지에는 모두 이 규모로 나옵니다. <여지도서> 경상도 칠원 성지에는 여기에 더해 여첩(女堞)이 136개, 옹성이 여섯이라 했습니다.

<해동지도>에 나오는 칠원읍성.

<칠원현읍지> 건치 연혁에는 임진왜란 때 병화에 불타 읍리(邑里)를 보전하지 못하매 창원부에 속했다가, 만력(萬曆) 정사(1617)년에 다시 설치했다 했습니다. 규모는 위 기록과 같고 연지(蓮池)가 택승정(擇勝亭) 아래에 있고, 또한 백화당(百和堂) 아래에도 있다고 나옵니다. 객관 남쪽 택승정은 없어졌고, 진귀루는 진태루(鎭兌樓)로 나옵니다.

<대동지지> 칠원현에는 읍성 규모와 옹성은 위와 같고 우물 하나, 못 하나가 있다 했으며, 누정인 진귀루(鎭龜樓)와 망궐루(望闕樓)가 있다고 전합니다.

성은 구성(龜城)이라 불리는 마을의 충적지에 만든 평지성이고, 평면 형태는 지세를 따랐으므로 서쪽이 넓고 동쪽이 좁은 사다리꼴입니다. 주민들 말로는 1940년대 만 해도 객사와 택승정과 남문 등이 남아 있었습니다. 택승정이 <칠원현읍지>에는 없어졌다고 했는데, 주민들의 기억은 이와 다릅니다.

가까이 소방도로를 냄에 따라 한 2003년 발굴에 의하면, 문헌과 고지도에 나오지 않던 북문 터가 드러났고, 조선시대 건물과 그 담장, 우물, 도로로 헤아려지는 구조물이 나왔습니다. 문은 지지와 고지도에 나타나지 않던 것이라 했는데, 까닭은 이런 자료가 생산되기 전에 일부러 없앴기 때문입니다. 조사에서 드러난 건물은 임진왜란 때의 병화로 불탄 뒤에 다시 세운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위치로 보아 객사 남쪽 망궐루일 것으로 헤아려집니다. 객사 남쪽에서 왕의 전패를 모신 곳을 궐로 여겨 대궐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인 듯합니다.

◇웃개나루 가는 길 = 칠원읍성을 나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성산 서쪽으로 난 길을 따릅니다. 지금은 성산을 무릉산이라고도 하지만, 실제 무릉산은 창원시 북면과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더 동쪽에 있습니다. 성산이라 불리는 것은 위에 가야시대에 쌓았다고 전해지는 산성이 있어 그렇습니다. 옛 지도를 보면 성산 남쪽 아래 금강지(金鋼池)라는 작은 못이 있었는데 지금은 묻혀 논이 됐습니다. 금강지 있던 곳을 지나 성산 자락을 서쪽으로 지고 돌면, 마을 들머리 오래된 느티나무를 만납니다.

이곳을 지나면 머지않은 곳에서 웃개나루로 이르는 길은 칠북의 영포역으로 가는 길과 갈라지게 됩니다. 지금의 칠원 입체교차로 부근인데, 우리는 게서 북쪽으로 길을 잡아 창고가 있던 천계리 창동으로 길을 잡습니다.

<해동지도>에 그려진 안곡산(安谷山) 동쪽의 갈림길은 지금의 천계리 창동 근처인데, 지도에는 이룡리와 용성리 사이에 긴 습지가 있고 그 곁에 긴-쑤(장수 : 長藪)가 그려져 있습니다. 옛 지도에 그려진 습지는 칠서농공단지 동남쪽에 있는 지금의 모시벌늪으로 헤아려집니다. 늪의 동쪽에 조성됐던 긴-쑤는 거의 사라졌는데, 습지의 길이 방향을 따라 조성된 긴 숲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곳을 비롯해 대산면과의 사이에 두어 개의 습지가 더 그려져 있고, 거기에도 쑤(藪)가 조성돼 있습니다. 아직 분양도 덜 돼 제대로 이용조차 되지 않는 농공단지를 만들기 위해 희생시킨 자연을 생각하면, 그 조급함에 분노가 치밉니다.

남지 웃개나루에서 본 경양대와 칠서 웃개나루. /최헌섭

◇웃개나루(상포진 : 上浦津) = 늪과 쑤가 많았던 지금의 칠서농공단지를 지나 계내리의 주세붕 선생 묘역 앞으로 열린 길을 따라 웃개나루가 있던 진동(津洞) 마을에 이릅니다. 이곳에 서면, 왜 여기에 나루가 두어졌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행(蛇行)하는 낙동강의 둔치가 가장 잘 발달해 이곳에서 너비가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또 계내리 쪽 웃개나루에는 낙동강 기슭에 큰 바위 절벽이 버티고 있어 쳐내려오는 물살을 막아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루마을이란 뜻의 진동은 이곳에 있던 웃개나루에서 비롯한 이름인데, 예전에는 상포(上浦) 우포(雩浦) 우포( 浦) 우질포( 叱浦)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적혔습니다. 우질포향( 叱浦鄕) 가까이 있는 나루라 우질포라 했다가, 우포( 浦)가 되고, 달리 우포(雩浦)라 했음은 나루 가까이 있는 경양대에서 기우제를 지냈음을 반영하며, 그것이 소릿값을 취해 웃개로 읽히다가 한자로 상포라 적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상포라 이른 사례는 조선 전기에 기록된 <한강선생봉산욕행록>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웃개나루를 오가던 통영로는 상류에 남지철교가 놓일 때까지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다가, 1931년 착공한 남지철교가 1933년에 개통되면서 밀려났습니다. 웃개나루는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와 창녕군 남지읍 남지리를 잇던 나루인데, 두 곳에서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부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경양대(景釀臺)

<해동지도>에는 칠원에서 영산으로 이르는 두 개의 길이 그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안곡산 봉수대의 동쪽에서 갈라져 칠서면 계내리 진동(津洞)마을에 있는 경양대 곁의 웃개나루를 건너 영산현에 듭니다. 바로 이곳이 통영로에서 낙동강 하류를 건너는 길이지요. 경양대는 우질포 서쪽 낙동강 기슭에 튀어 나온 바위 절벽의 이름이랍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칠원현 고적에 "그 위는 손바닥처럼 편평하여 족히 1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가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나옵니다. 시와 술을 즐기며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했던 고려 무인집권기의 유랑 문인 이인로(1152~1220)가 노닐었다는 기록과 결부해 보면, 경양대라는 이름에서 질펀한 술내음을 느낍니다.

우질포는 이곳에 있던 우질포향( 叱浦鄕)과 상관하는 이름입니다. 우질포는 달리 웃개라고도 하는데, 그 이름은 지금도 그리 불리며, 이미 17세기 초엽에 정리된 <한강선생봉산욕행록(寒岡先生蓬山浴行錄)>에도 상포(上浦)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한강 정구 선생이 동래온천에 요양을 떠나던 일을 제자들이 남긴 기록인데, 그때 한강 일행이 이곳 웃개(상포·上浦)에서 하루를 묵었던 것입니다. 그 또한 이인로의 행적을 좇은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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