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속 생태] (42) 열대식물 파초

어릴 적 절에 갔는데 엄청나게 잎이 큰 나무가 있었다. 누군가 바나나 나무라고 했다. 귀해서 추석에 제사상에 올리고 음복할 때 하나 얻어 먹던 그 귀한 바나나가 절에 있다니 어린 맘에 스님들은 참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그 시절 쌍둥이 가수 '수와 진'이 부르던 '파초'가 바로 그 바나나 나무라는 것을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파초에 바나나가 열릴까

창원 의림사에 있는 파초.

파초를 하우스에서 키우면 바나나가 열린다고 믿는 분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파초에도 손가락만한 작은 바나나가 달린다. 몽키바나나처럼 작은 바나나가 달리는데 이걸 하우스에서 키우면 열대식물인 파초에도 큰 바나나가 달릴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하우스에서 바나나를 키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찾아보니 아니란다. 파초는 중국 원산의 귀화식물이고 영어로 Japanese Banana라고 하고 전문가들이 말하는 학명도 다르다. 바나나는 인도와 아시아 원산이고 파초랑은 같은 외떡잎식물에 생강목 파초과까지는 같은데 종이 다르다. 파초와 바나나는 다른 식물이다.

부처님 고향 인도에서는 불경에 나오는 파초가 바나나가 맞을 것인데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한국에도 살 수 있고 중국에서 구할 수 있는 파초가 한국 불교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만 해 본다.

충남 천안 광덕사 벽에 그려진 달마대사. 혜가 스님이 팔을 자르니 눈 속에서 파초가 솟아나 받쳤다고 한다. /정대수

파초야 넌 나무니 풀이니

파초라는 이름보다는 바나나 나무로 더 알려진 녀석을 이리저리 살펴 보아도 나무처럼 생겼다. 그래서 바나나 나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높이는 5m까지 자라고 잎 하나가 길이는 2m에 폭이 20cm가 넘는다. 하지만 나이테가 없어 나무가 아니라 풀이란다. 대나무도 나무가 아니지만 나무처럼 귀한 대접을 받는 생활필수품이듯 파초도 나무가 귀한 동네에서 그릇을 만들거나 생활용품을 만들기도 하고 종이처럼 붓글을 쓰기도 하면서 귀한 나무처럼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겨울이 되면 말라 죽는 파초

따뜻한 중국 남쪽에서 태어난 파초는 고려시대에도 기록이 있지만 주로 조선시대 기록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이름난 정원과 양반댁에는 파초를 심은 기록이 있다. <춘향전> 춘향이네 집에도 파초가 있었단다. 국사 시간에 이름을 여러 번 들었던 <산림경제>란 책에는 "겨울에 줄기를 조금 남겨두고 베어 뿌리를 캐서 땅 속에 갈무리한다"고 기록이 있다. 파초는 땅 속에 덩이줄기가 있는데 땅 속에 고구마나 감자 같은 덩이를 포기 나누기로 번식한다. 따뜻한 남쪽 지역에선 겨울을 잘 나지만 추운 서울에선 해마다 겨울에 파초 뿌리를 보관하는 것이 엄청 큰 일이었을 것이다. 고구마 무강이나 무를 겨울에 땅 파서 보관해 보신 분들은 그 맘을 잘 아실게다.

파초가 절에 간 까닭은

파초는 나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양파껍질처럼 벗기고 벗기면 그 안에 계속 겹겹이 겹쳐져 있다. 파초는 나무처럼 보이지만 나이테도 없이 그 빈 속은 알맹이도 없고 견고함도 없다는 것이다. 또 자르면 그 위에 다시 새싹이 올라오는 파초의 모습에서 불교의 제법무상(諸法無常)과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를 이야기한다. 욕심 많은 중생이 보면 늘 불가의 텅빈 충만은 어렵기만 하다.

선비와 신선이 좋아한 파초

기록을 보면 파초는 유교, 불교, 도교 모두 좋아했다. 도교의 신선들이 들고 다니는 부채가 바로 파초선(芭蕉扇)이다. 파초 모양의 부채인데 파초는 잎이 넓고 커서 파란 하늘처럼 보여 녹천(綠天)이라고 불렀다. 말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 올라오는 모습이 기사회생의 상징이 되었다.

겸재 정선 척재제시. /간송미술관

조선시대 선비들도 파초를 좋아했다. 지금도 남쪽 지역 이름난 고택에 가면 파초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귀한 열대 식물이라 귀하기도 했지만 파초의 푸름에서 군자의 기상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계속 새로운 잎이 밀고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자강불식(自强不息)과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배우며 새기고자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크고 넓은 잎이 창가에 비치는 느낌을 즐겼을 것이다. 무더운 여름 시원하게 내리는 한줄기 소나기가 크고 넓은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즐겼다.

파초의 꿈과 뜻

비가 오면 창문을 닫고 살아야 하는 요즘 비싼 집보다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보이는 듯 들리는 옛집이 그립다. 빗방울에 파초 잎이 춤을 추고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수 있는 그 마음이 부럽다. 내 집에 파초 한 그루 심어 빗소리를 보고 듣고자 하면 사치일까?

/정대수(함안 중앙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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