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 막힐 땐 무조건 겨울바다로 가자. 집 가까이 있는 자그마한 바다도 좋고 사람 발길이 없는 조용한 시골바다도 좋다. 하염없이 몸을 휘감는 큰 바다여도 좋다.



한 해가 가도 옆구리가 시리고 어깨가 추운 이들은 바다를 품에 안고 황금물결 위에 자신을 던져보라. 어느 새 한마리 새가 되어 ‘하잘것 없는’ 상념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흩어진 상념들은 초록빛 물에 침전되어 또다시 파란 바닷물로 되살아난다. 인생이 그런 것일게다. 물속 깊이 사라지는 듯하다가도 봉긋하니 물 위에 올라 햇볕을 부지런히 받는다. 잇따른 실패 속에도 한줄기 희망은 늘 있게 마련이다.



통영 풍화리 해변은 희망을 마음의 그물에 가득 담아올 수 있는 곳이다. 통영 자체가 이미 ‘동양의 나폴리’라고 인정받고 있지만 고즈넉한 풍화리 해변은 그 이상의 팬터지다.



궁항에서 출발해 해란·명지·수월·모상을 거쳐 다시 궁항으로 되돌아나오는 풍화리 드라이브 코스는 지도상으로 봐도 사방이 바다이다.



통영 땅에 혹이 난 형태로 자리한 풍화리는 산양일주도로에 치여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해변이다. 무심결에 풍화리에 접어들었다 해도 ‘돌면 또 바다이고 또 돌면 바다’인 풍화리의 매력에 끌려 끊임없이 바다를 따라가게 된다.



해란마을은 바다 가운데 솔숲이 볼거리다. 갈매기가 수없이 날고 백로들이 자태를 뽐내다가 수평선 멀리로 가버린다. 인기척이 싫은가보다. 간간이 보이는 낚시점이 있는 것으로 봐서 낚시하는 이들이 많이 오는 모양인데 바다를 향해 낚싯대를 던지는 꾼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명지마을은 풍화리의 반환점이다. 돌아나오는 첫 지점에 경남수산종묘배양장이 눈에 띈다. 호기심에 배양장으로 들어가면 드라이브 길이 끊어진다. 그러나 어느 곳보다 가까이서 초록빛의 통영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가없이 펼쳐진 바다를 가슴에 묻고 비포장길을 달려 조금 오면 굴껍데기가 가득한 마을이 보인다. 수월마을이다. 지리상으로 볼 때 제법 큰 산이 앞에 놓여있어 태풍이 와도 끄떡없을 것 같다. 수월마을은 잔잔한 느낌보다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가깝다. 낚시꾼들의 차량이 즐비하고 아이들의 모습도 이따금씩 보여 사람사는 냄새가 풍긴다.



200m 가량 가다보면 아담한 학교가 보인다. 울긋불긋 색칠한 놀이기구와 교실의 작은 창문이 앙증맞다. 풍화리에 사는 아이들이 다니는 풍화분교다. 이 곳은 모상마을인데 굴양식을 하고 고기를 잡아 먹고 산다고 한다.



‘통영과 여수에 가서는 돈자랑 하지 말라’고 했던가. 풍화리 사람들의 표정은 의외로 여유있고 편해 보인다. 힘겹게 사는 찌든 모습보다는 드넓은 바다를 닮은 느긋함이 있다.



통영까지 가는 동안 보이는 들판은 황혼기 노인 같지만 바다를 끼고 도는 풍화리의 들녘은 봄처녀같다. 개나리가 수줍게 겨울바람에 떨리고, 선혈처럼 붉은 동백이 초록바다와 아주 잘 어울린다. 햇볕이 내리쬐는 양지쪽에는 냉이와 봄나물들이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고 있다. 노랗게 섬을 물들이는 유자와 도시처럼 비닐을 덮지 않아도 바다의 수분을 머금고 잘 자라는 마늘도 정겹다.



해송 사이로 바람에 밀려 춤추는 바다를 뒤로 하면 궁항에 다시 도착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통영 주변의 섬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달아공원이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통영시내이다. 달아공원에서 보는 바다가 아름답다지만 풍화리의 바다를 본 후 달아공원에 올라 관망하는 바다는 한 수 아래이다.



‘동백을 뜯으며/ 저녁이 온다/ 어둠 속으로/ 막배가 떠나가는 소리/ 습관처럼 새들이 날아간다/ 나는 허술해진 밤을 걷는다.(생략)’(최갑수의 ‘밤을 말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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