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해제는 "시민 저항·군경 소극적 수행 덕분"
국회 소수의견 존중·대통령 협치정신 몰각 지적
이승만·박정희·전두환 국가긴급권 남용 역사 언급
"정치적 불확실성 확대로 외교·경제적 불이익 명백"
"나라에 봉사해온 군인, 다시 시민과 대치하게 해"
국군 정치적 중립성 위반 국군통수권 행사도 비판
법조인 위치확인 시도 관여 '사법권 독립 침해' 판단
헌법학자들 "세계 민주주의 역사 중요 이정표" 의미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8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주문한 결정문은 A4용지 114쪽이다. 판단 부분에서만 '민주주의'는 34회 언급됐는데, '국민'은 127회, '헌법'은 287회다.
특히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라는 표현은 헌재가 12.3 불법 비상계엄에 맞선 시민 저항에 가치를 부여하고 경의를 표한 것으로 해석됐다. '민주주의와 조화', '협치' 정신을 강조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민주주의와 조화·협치 강조 = 헌재는 피청구인 윤석열의 헌법·법률 위반 행위가 파면을 결정할 만큼 중대한지 따졌다.
먼저 헌재는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됐다는 이유로 피청구인의 법 위반이 중대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피청구인이 헌법을 위반해 대통령 권한 행사에 불신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통령 권한 행사는 민주주의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짚었다.
헌재는 "피청구인이 야당이 중심이 된 국회의 권한행사에 관해 권력의 남용이라거나 국정 마비를 초래하는 행위라고 판단한 것은 그것이 객관적 현실에 부합하는지 여부나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여부를 떠나 정치적으로 존중돼야 한다"면서도 "피청구인 내지 정부와 국회 사이의 이와 같은 대립은 일방의 책임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조율되고 해소되어야 할 정치의 문제이다. 이에 관한 정치적 견해의 표명이나 공적인 의사결정은 어디까지나 헌법상 보장되는 민주주의의 본질과 조화될 수 있는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짚었다.
또 헌재는 "국회는 당파의 이익이 아닌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야 한다는 점에서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 피청구인 역시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헌법이 정한 권한배분질서에 따른 협치의 대상으로 존중했어야 한다"면서 "그럼에도 피청구인은 국회를 배제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는 민주정치의 전제를 허무는 것으로 민주주의와 조화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배제는 정치적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헌재는 "피청구인에게는 야당의 전횡을 바로 잡고 피청구인이 국정을 주도해 책임정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국민을 설득할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있었다"며 "그 결과가 피청구인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았고 피청구인이 느끼는 위기의식이나 책임감 내지 압박감이 막중했다고 하여 헌법이 예정한 경로를 벗어나 야당이나 야당을 지지한 국민의 의사를 배제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됐다"고 지적했다.
◇국가긴급권 남용 역사 언급 = 헌재는 "우리나라 국민은 오랜 기간 국가긴급권의 남용에 희생당해 온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며 1952년 이승만, 1971·1972·1979년 박정희, 전두환·노태우의 12·12군사반란 이후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선포까지 언급했다.
그러면서 약 45년이 지나 선포된 12.3 계엄을 두고 헌재는 "피청구인에 의한 국가긴급권의 남용은 국민의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고 헌법 질서를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대외 신인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정치적 불확실성의 확대로 인한 외교적, 경제적 불이익 등을 고려할 때, 국익을 중대하게 해하였음이 명백하다"며 "결국 우리의 헌정사적 맥락에서 이 사건 계엄 선포 및 그에 수반하는 조치들이 국민에게 준 충격과 국가긴급권의 남용이 국내외적으로 미치는 파장을 고려할 때, 피청구인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고 국정을 성실하게 수행하리라는 믿음이 상실되어 더 이상 그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이와 관련해 계엄 당일 국회에 군경이 투입된 데는 "국군통수권자인 피청구인이 정치적 목적으로 그 권한을 남용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해 온 군인들이 또다시 일반 시민들과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라며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에 반해 국군통수권을 행사했으므로 헌법 조항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헌재가 법조인 위치 확인 시도를 따로 판단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헌재는 "피청구인은 퇴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전 대법원장 김명수 및 전 대법관 권순일에 대해 필요시 체포할 목적으로 행해진 위치 확인 지시에 관여했다"면서 "이는 현직 법관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언제든지 행정부에 의해 체포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압력을 받게 해 소신 있는 재판업무 수행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며 사법권 독립 침해라고 판단했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 이정표 = 헌법학자들은 이번 결정이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장희 국립창원대 법학과 교수는 "12.3 비상계엄으로 훼손된 민주주의와 헌법 정의가 회복될 수 있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미국도 트럼프가 민주주의를 퇴행시킨다는 지적이 많고, 유럽에서는 극우세력이 적잖이 나타나고 있고, 터키와 미얀마에서는 쿠데타로 군정도 일어나 민주주의 파괴로 많은 사람이 힘든 상황인데 이번 결정이 세계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수호와 회복에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모범적 사례가 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다소 지연된 헌재 결정에는 국민 신뢰를 되찾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해원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탄핵소추안 가결 111일 만에 결정이 나와서 복잡한 법리적 쟁점이 담겨 있는지 의문이었는데, 지연된 결정을 이해하거나 용서할 만큼은 없었다"며 "앞서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심판 결정은 논리적으로 흠이 많아 설득력도 떨어졌고, 윤석열 탄핵심판도 지연되면서 헌재 신뢰가 많이 훼손됐는데 앞으로 이런 신뢰 회복이 과제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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