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정치와 지역 정치인에 실망한 유권자들
여론조사 조작으로 민주주의 절차 파괴
제2의 명태균 안 나오려면...유권자의 선택 중요
“시골 군수나 시의원 그거 뭐라고 발로 차도 공천이 된다”.
명태균 씨는 경북 고령군수와 대구시의원 예비후보자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에게 2억 4000만 원을 받은 대가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정치 브로커 명 씨는 경남에서 여론조사를 매개로 입지를 넓혀갔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정치권은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명 씨의 검은 손을 붙잡으려 애썼다. 경남 지역 정치인 다수도 명 씨와 연결돼 있다. 이같은 ‘그들만의 정치’에 철저히 농락당한 건 결국 유권자와 지역민들이다.
◇김영선 비루함에 지역민 모욕감 = 명태균 씨는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윤석열 후보에게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를 만들어주고, 이를 계기로 윤 대통령 부부와 가까워졌다. 이들에게 공천권을 요구하고 뒤에서는 다른 정치인에게 금품을 챙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영선 전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명 씨 도움으로 창원 의창 지역구 공천을 받고, 세비 8000여 만 원을 대가로 지급한 혐의가 있다.
민간인 명 씨는 김 전 의원 앞에서 이른바 ‘갑’이었다. 명 씨가 김 전 의원에게 호통 치는 녹취록이 공개된 바 있다. 명 씨는 “김건희가 권력을 쥐고 있지 않느냐, 김건희에게 딱 붙어야 본인이 다음에 6선 할 것 아닙니까”, “시키는 대로 해야, 어디 붙어야 먹고 산다고 내가 얘기해도 씨”라고 김 전 의원에게 소리쳤다.
지역구 주민들은 김 전 의원의 이같은 초라한 모습에 모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27·의창구 봉곡동) 씨는 “공천은 정당 안에서 고르고 골라 제일 괜찮은 후보를 세우는 일”이라며 “그동안 정당만 보고 투표했었는데, 이제는 무엇을 보고 투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명 씨와 김 전 의원은 민주주의 근간인 선거 제도를 흔들면서 유권자의 권리마저 길을 잃게 했다. 박태영(48·마산회원구 석전동) 씨는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유권자 하나만 보고 가겠다면서 큰소리치지 않느냐”라며 “앞에서는 그렇게 말해놓고 유권자가 아니라 명태균이라는 개인만 보고 선거를 치렀다고 생각하면 내가 찍었던 표가 아깝게 느껴진다. 괜히 시간 내서 투표하러 가는 게 아니지 않느냐”고 분노했다.
시민들은 12·3 내란 사태 이후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들고 있다. 이들은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하며 다시 만들 세계를 그리고 있다. 박종철 윤석열퇴진경남행동 집행위원장은 “시민들은 여론이 조작됐다는 사실에서도 분노하고 있다”라며 “명 씨와 윤 대통령은 여론조작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조작했다”라고 지적했다.
명 씨와 윤 대통령 부부의 공천 거래 의혹 중심에는 국민의힘이 있다. 공천 거래 의혹에 이어 내란 사태까지 빚어지는 동안 국민의힘은 민주주의 정당 역할을 하지 않았다. 최희태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정책국장은 “정치적 노선과 경로는 다르더라도 민주주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고, 공동체를 강화해야 하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라며 “국민의힘이 정당 역할을 제대로 못 한 데서 오는 유권자로서의 배신감, 분노, 공포가 있었다”고 짚었다.
◇민주주의 절차 파괴…유권자 역할= 현행 여론조사 제도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명 씨가 2021년 국민의힘 서울시장 보궐선거 경선과 대선후보 경선, 2022년 국회의원 보궐선거 경선 시기에 비공표 여론조사를 조작한 정황이 포착됐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불법 여론조사가 더 남아있을 가능성도 있다. 정치인들은 명 씨 마법의 대상이 되고자 안달했다.
홍재우 인제대 공공인재학부 교수는 “의도적으로 왜곡된 여론조사는 정당한 민주주의 절차를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라며 “사람들이 정치인을 선택하려면 정보가 필요한데, 그 통로를 오염시켰다”고 꼬집었다. 이어 “기본적인 민주주의 게임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 치트키를 쓴 거나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공개한 ‘2020~2024년 여론조사 위반행위’는 452건에 달한다. 경고에서 그친 경우가 78.3%로 가장 많았고, 고발 조치까지 이어진 경우는 15.3%에 불과했다. 낮은 처벌 수위에 불법 여론조사가 고개 들기 쉬운 환경이다.
불법 여론조사를 막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미공표 여론조사도 공표용 여론조사처럼 규제받게 한다거나, 위법 행위에 중징계를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지난해 12월 국민의힘에서는 일명 ‘명태균 방지법’이라 불리는 불법 여론조작 방지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불법 여론조사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이장희 창원국립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기본적으로 선거의 자유와 공정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선거에 대한 불신을 근본적으로 초래하는 문제가 있다”라며 “선거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는 행위는 선거의 근간을 흔드는 거고, 선거의 근간을 흔들면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는 범죄 행위”라고 지적했다.
명 씨와 윤 대통령 부부가 불법 여론조사로 선거판을 흔든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더라도 공직선거법 공소시효가 선거일 후 6개월인 점을 감안하면 처벌이 어렵다. 제2의 명태균이 나오지 않으려면 유권자의 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교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과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권력을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권력을 잡아 와서 문제가 되는 것”이라며 “이제는 유권자의 몫이다. 단순히 법적인 책임을 지우게 해서 끝낼 것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도 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다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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