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2년, 되짚는 노무현 정신] (1) 민주주의와 깨어 있는 시민

"역사는 진보한다"며 다음 단계 열쇳말로 '대화와 타협' 제시
서거 이후에도 한국 정치 공전 거듭…소통 뿌리 내리지 못해

윤 대통령 취임사서 '연대 가치' 강조했지만 대화·타협 실종
정치 대립 심화·국민 통합 저해 민주주주의 발전커녕 퇴보

'대연정' 근본적 정치 구조 변화 꾀했던 노무현 정신 재조명
노무현, 진보가치 '연대' 제시하며 '시민' 정치 참여 강조해

“저는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다하고 존경받는 나라를 위대한 국민 여러분과 함께 반드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취임사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겠다고 약속했다. 과학과 기술, 혁신으로 도약과 빠른 성장을 이뤄내 양극화와 사회 갈등을 해소하겠다고도 했다.

지난 2년 성적표는 어땠나. 국정 운영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여당은 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남은 3년, 어두운 전망을 걷고 한국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적어도 큰 결단과 실행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15주기와 윤 대통령 취임 2주년이 겹치면서 ‘노무현 정신’이 열쇳말로 회자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바닥에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글귀가 써있다. /노무현재단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바닥에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글귀가 써있다. /노무현재단

 

◇역사는 진보한다 = “역사는 진보한다, 이것이 나의 신념이다.” 노무현은 2007년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출판부가 펴낸 책 <권력자의 말> 기고문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제 한국의 민주주의 과제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 문화를 뿌리내리는 것이다.’ 노무현은 정당 간 갈등과 대립 심화로 국민 통합이 저해된다고 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해법으로 대화와 타협을 제시했다. 그러나 노무현 사후에도 한국 정치는 소통과 협치 주변부를 맴돌며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노무현 참여정부 다음으로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초대 내각 인선 문제를 겪으며 ‘불통’ 인식을 쌓더니 2008년 촛불집회 때는 ‘명박산성(경찰 차벽과 컨테이너)’으로 아예 단절됐다. 두 차례 대국민 사과조차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정연주 한국방송공사(KBS) 사장 해임을 비롯한 언론 장악도 진행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서거는 극단의 한 단면이었다.

직선제 도입 후 첫 과반수 득표로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국민 대통합을 강조했지만 국민 갈등은 최고조였다. 희대의 국정농단 사건으로 급기야 대통령 탄핵에 이르렀다. 모순적이게도 원칙과 상식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국민 공감대가 형성된 계기가 됐다.

이후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기치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해 적폐 청산을 벌였으나 부동산 정책 부진 등 부정 평가로 보수정당에 곧바로 정권을 넘겨줬다. 문재인 정부가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던 인물이 대척점에 선 것이다.

노무현이 살아있었다면 윤석열 정부 출범까지 지난 4736일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우리는 두 번이나 정권을 잡고 노력했지만 그동안의 민주주의와 진보의 성취 또한 국민이 생각하고 있는 수준 그 이상을 넘어서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퇴임 이후 말과 글을 엮은 책 <진보의 미래>에 비춰, 노무현은 윤 정부 출범을 국민 뜻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윤석열 집권 2년간 진일보했느냐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지 못할 듯하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 문화’가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5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3주기 추도식이 열린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 참석한 시민. /경남도민일보DB
2015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3주기 추도식이 열린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 참석한 시민. /경남도민일보DB

 

◇윤석열과 노무현 = “진보라는 건 그게 아니고 ‘차가 좀 비좁나?’ 그래도 뭐 다 같이 가야 되는 사람들인데 타야 될 거 아이가? 우리도 좀 타자 근데 못 타게 하니까 ‘왜 못 타 인마, 김해 사람은 손님 아니야?’ 이러면서 올라타거든요. ‘김해 사람은 손님 아니야?’ 그렇게 하고 막 밀고 가는 게 진보죠. (중략) 그럼 이제 진보의 가치는 뭐냐? 연대, 함께 살자. (중략) ‘쟤들도 태워 줘라’ 이거 아닙니까?”

노무현은 <진보의 미래>에서 ‘연대’를 진보의 가치로 제시했다. 보수정당 소속인 윤석열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연대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통합 기대감을 낳았다.

같은 뜻이 담긴 그릇이었지만 쓰임새는 달랐다. 정부 출범 때부터 야당과 협치 없이는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어려운 여소야대 정국인데도 ‘내 편’이 아니라면 연대하지 않았다. 보수 언론도 22대 총선에서 정부 심판론이 불거진 이유를 윤 대통령 오만과 불통으로 꼽을 정도로 타협과 대화는 실종됐다.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하면서 임기 말까지 식물정부로 전락할 위기를 맞았지만 변화 기대치가 낮다.

최근 책 <공화주의자 노무현>을 펴낸 정치철학자 장은주 영산대 교수는 이 시점에서 ‘대연정 제안’을 소환했다. 2005년 6월 노무현은 중·대선거구제 개편을 앞세워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 연립정부 구성을 제안했었다.

장 교수는 통화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노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답게 공화화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고 정권을 잡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근본적인 정치 구조를 바꾸는 것으로 생각하며 대연정을 제안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비록 국민 반대와 정치권 후폭풍으로 무산됐으나 대연정 제안 바탕에 깔린 노무현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는지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22대 총선에서 윤석열 정부에 심판이 내려졌지만 단순히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다고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국민이 내린 정권 심판을 단순히 야당 신뢰로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열린 '윤석열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위해 손을 든 기자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열린 '윤석열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위해 손을 든 기자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어떤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가 경제를 망쳤다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초기 대응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것이 오늘의 상황에 결정적인 원인은 아닐 것이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이것도 노무현 정부 탓이란다. 이건 억지다. 어느 쪽이나 그런 인식으로는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보의 미래> 가운데)

이명박 정부 출범은 곧 참여정부 경제 파탄 심판이라는 주장에 노무현은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라며 미래를 말했다. 보수가 살아야 진보도 살 수 있다는 것. 윤석열 정부 남은 3년에 빗대자면 지난 2년 탓을 하거나 반복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연대의 가치’를 되살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무현 정신 한가운데에 ‘깨어 있는 시민’이 있다. 장 교수는 노무현을 진보적·민주적 공화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 모든 시민의 존엄한 평등과 평등한 존엄성을 인정하는 체계를 일궈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의 진보를 통상적인 진보 개념과 구별해 ‘시민적 진보’로 풀이했다. “시민의 참여와 그것이 전제하고 함축하는 시민성의 가치와 역할을 강조하는 진보”라는 이유에서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퇴임 이후 진보의 미래를 고민했던 노무현은 시민에게서 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시민이 주권자로서 권리를 찾고 올바르게 행사해야 한다고, 그것이 권리이자 의무라고 강조했다.

‘내가 말하는 시민이라는 것은 자기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 자기와 정치, 자기와 권력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적어도 자기의 몫을 주장할 줄 알고 자기 몫을 넘어서 내 이웃과 정치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일반화해서 정치적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시민이라고 보는 것이죠. 이런 개념에서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시민이고 그 시민 없이는 민주주의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시민의 숫자가 적다면 시민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죠.’ (<진보의 미래> 가운데)

노무현은 스스로 “완전히 실패한 전략”이라고 평가한 대연정을 제시하면서까지 선거제도를 고치려고 했다. “성숙한 민주주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이루려면 사람만이 아니라 제도도 바꾸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장 교수도 “탄핵의 길보다는 선거제도 개편을 비롯해 시민이 주도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법제화하는 등 개헌의 길이라는 두 번째 길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보수와 진보, 정치의 연대와 ‘깨어 있는 시민’ 목소리를 수렴할 제도적 보완이 미완의 노무현 정신 아닐까.

/최환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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