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陜川)] 함벽루(涵碧樓)의 승경을 감상하는 방법.

합천(陜川) 함벽루(涵碧樓)는 조선팔도에서 높이 평가되는 명승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시대 관련 기록이 등장한 이래 꾸준히 시문이 창작되었고, 조선시대 지리지 및 읍지 등에 합천을 대표하는 누정으로 이름을 올렸다. 오늘날까지도 그 위상에 주목하여 경상남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거니와 합천팔경(陜川八景)의 하나로 지목되어 많은 이들이 다녀가는 공간으로 유명하다.

함벽루가 명성을 얻은 이유는 그 아름다운 경관에 기인한다. 시야가 탁 트여 산수를 조망할 만하고 햇살에 반사된 윤슬이 누각을 물들여 그 은근한 정취가 관람객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과거 합천에 다녀간 여러 기록에도 저마다 주목한 함벽루의 매력이 담겨 전하니 과연 선대의 문인들은 어떠한 이유로 이곳에 매료되었는지 궁금하다. 이에 함벽루의 관련 기록을 살펴 오늘날 함벽루를 누리는 하나의 단서로 삼고자 한다. 이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고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최고의 비경을 자랑하는 합천 함벽루. /경남도민일보DB
최고의 비경을 자랑하는 합천 함벽루. /경남도민일보DB

◇산수와 어우러진 건축미 = 첫째, 산수의 풍광과 어우러진 함벽루의 모습이다. 앞으로 황강(黃江)이 흐르고 뒤로 매봉산을 등져 맞은편에서 바라본 외관이 그림과도 같았던 모양이다. 안진(安震. ?∼1360)의 기문은 다음과 같다.

어제 임금의 명으로 장차 강양(江陽)에 가게 되었다. 가는 길에 누각 하나를 바라보니 처마와 기둥이 날고 춤추며 단청 빛이 눈부시게 빛나 마치 봉황이 허공에 나는 듯하였다. 내가 객을 돌아보고 말했다. "저 누각은 어느 때부터 창건하였습니까? 이 지역을 다스리는 자는 누구입니까?" 객이 이에 대답하며 말했다. "바로 지금 태수(太守)가 새로 창건한 것입니다." 내가 이를 듣고 기뻐서 즉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난간에 올라 사방을 보니 그 강산과 면세가 거의 지난번 보았던 두 누각보다 못하지 않고 단청의 장식은 기이하고 교묘하여 이보다 나았다.

-안진(安震), <동문선(東文選)>권68, 함벽루기(涵碧樓記)

안진이 지은 함벽루기의 일부이다. 함벽루의 역사를 기억하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시작에 왕명으로 강양(江陽)에 가게 되었다고 하였고 강양은 합천의 옛 이름이다. 안진은 합천으로 향하던 중 강 건너 화려한 누각을 마주했다. 화려한 제도에 오르고자 하는 마음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누각에 올랐고 자신이 이전에 보았던 두 곳의 누대보다 오히려 뛰어남을 예찬했다. 

안진이 거론한 누대는 평양 부벽루(浮碧樓)와 진주 장원루(壯元樓)를 가리킨다. 장원루는 바로 오늘날 촉석루(矗石樓)의 옛 이름이다. 앞선 내용에 이미 이들을 구경한바 최고의 누정이라 손꼽은 내용이 보이고 실제 당대의 위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새로 건립된 함벽루에 올라 그 아름다움이 이들에 어금지금하다고 하였으니 당시 함벽루의 경관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특히 안진은 멀리서 함벽루를 보고 굳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누각으로 향했다. 지금의 합천군 대양면 정양리에서 바라본 것이 분명하다. 산수와 어우러진 외관이 이목을 사로잡았음을 알겠다.

해동지도, 합천군, 18세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해동지도, 합천군, 18세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함벽루에서 바라본 풍경 = 둘째, 함벽루에 올라 조망하는 경물의 아름다움이다. 조선 전기 강희맹(姜希孟·1424∼1483)이 함벽루의 중수를 기념하여 지은 기록을 보인다.

족형(族兄) 무송(茂松) 윤담수(尹淡: 윤자영(尹子濚)) 씨는 박아(博雅)한 군자이다. 기축년(1469) 가을, 나는 종부정(宗簿正)으로 경상도 단성현(丹城縣)에 모친을 문안했다. 길이 합천을 경유할 때 담수가 합천군수(陜川郡守) 유후(柳侯)의 편지와 고을 함벽루 기문을 가지고 나에게 보였다. 담수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함벽이란 누각은 고을 남쪽 4리 정도에 있습니다. 절벽에 기대어 긴 강을 굽어봅니다. 남쪽으로 보면 여러 산이 읍하는 듯하고 푸른 병풍이 구불구불 이어집니다. 조금 서쪽 바위 모퉁이에는 오래된 절이 있어 새벽종과 저녁 북소리가 은은하게 구름 가에 울려 퍼집니다. 곧장 누각 동쪽 30보 되는 곳에는 큰 길이 있고 나루가 있습니다. 허리를 숙여 굽어보면, 길 가며 왕래하는 자와 강을 건너는 자들이 마치 개미둑에 개미가 지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함벽루의 대략입니다."

-강희맹(姜希孟), <사숙재집(私淑齋集)>권8, 합천함벽루중신기(陜川涵碧樓重新記)

1469년(예종 1) 가을, 강희맹은 단성으로 향하던 중 합천을 지나며 족형 윤자영을 만났다. 마침 함벽루가 중수된 것을 계기로 강희맹과의 친분에 기대어 기문을 받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윤자영은 강희맹을 만나 함벽루의 승경을 일일이 열거했다. 당시 함벽루에 올라 조망할 수 있는 경관이 요약되어 나타난다.

먼저 함벽루에서 펼쳐진 풍광을 조망한 내용이다. 가까이 황강을 굽어보고 먼 곳으로 산이 에두른 모습이다. 다음은 오래된 절과 어우러진 정경이다. 종소리를 감상할 만한 청각적 이미지가 가득하다. 바로 지금의 연호사(煙湖寺)를 가리키니 함벽루의 또 다른 정취를 제공한다. 마지막은 멀리 왕래하는 나그네의 풍경이다. 탁 트인 지세 덕분에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을 구경하는 재미가 가득하다. 과거와 달라진 지점은 일부 존재하겠지만 오늘날 함벽루에 올라 공감하기에 충분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 18세기, 합천군.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동지도, 18세기, 합천군.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오랜 역사의 자취 = 마지막은 세월의 흐름이 깃든 기억과 자취이다. 18세기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기록한 함벽루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 몇 리 정도를 가면 석벽(石壁)이 층층이 쌓여 있고 정자 하나가 나는 듯 남강을 굽어보니 이름이 함벽루이다. 고려 안진이 기문을 지어 진주 장원루·평양 부벽루가 이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견주기에 마땅하다고 여겼다. 안진은 충숙왕 때 사람으로 대개 함벽루는 신유년(1321)에 완성되었고, 누각을 지은 자는 대대로 훈신인 상락군(上洛君)의 맏아들 김후(金)라고 하였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 군수 유륜(柳綸)이 중수하여 강희맹이 기문을 지었고, 영종(英宗) 신유년(1741) 군수 조지항(趙持恒) 후가 중수하여 우암(尤菴) 송문정공(宋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기문을 지었다. 북쪽 바위에 우암이 쓴 함벽루 글씨가 각자되어 있다.

-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권68, 가야산기(伽倻山記)

이덕무가 기록한 함벽루의 역사이다. 안진의 기문에서 시작하여 강희맹의 중수기가 이어진 내력이 명확하다. 이어 17세기 조지항(趙持恒)이 합천에 부임해 함벽루를 중수하고 송시열이 기문을 지었다고 하였다. 특히 송시열은 함벽루 바위에 '함벽루'라는 각자를 남겼고 이는 오늘날까지 중요한 경물로 전한다.

이덕무의 기록은 함벽루가 지닌 역사적 연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고려시대 이래 건립되고 그 제도가 꾸준히 이어지며 지금에 국한되지 않는 유서 깊은 역사를 증명한다. 이는 누군가가 한순간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의 노력을 통해 성취한 결과이다. 한편, 송시열의 각자가 지닌 세월 또한 녹록지 않다. 대략 400년의 세월 동안 그 자리에서 함벽루의 존재를 증거한 산물이다. 과거 선현들이 매료된 이유를 돌아볼 만하다.

합천 연호사와 함벽루 원경, 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합천 연호사와 함벽루 원경, 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에 이르러서도 함벽루는 지속적인 관리를 통해 존속을 이어나갔다. 1811년(순조 11) 이채(李采)는 <함벽루중수기(涵碧樓重修記)>를 통해 합천군수 조진익(趙鎭翊)이 함벽루를 재건한 사실을 기록했다. 이후 세월이 지나 1860년(철종 11) 이진재(李晉在)가 다시 고쳐 짓고 조진익의 아들 조두순(趙斗淳)이 기문을 지어 이를 기념했다. 함벽루의 유구한 역사와 독보적인 승경을 지켜나가고자 한 노력의 결과이다. 지금도 함벽루는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채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가치를 계승하고 지켜나가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김세호 경상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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