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녀 취향 성장기>

"소녀 취향은 나를 문학적으로 성장시켰다. 이제는 이것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는 이주라 문화평론가는 그의 책 <소녀 취향 성장기>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책에는 주말 아침 TV에서 방영하던 만화영화, 학교에서 선생님 몰래 읽던 연애 소설, 밤 열 시 가족과 함께 보던 드라마 등 이른바 '소녀 취향' 여성 서사를 통해 여성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해 온 과정이 담겼다.

예를 들어 저자는 고전 <빨간 머리 앤>을 원작 소설과 영상으로 재생산된 영상물을 토대로 분석한다. 원작은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1908년에 출간한 <그린 게이블스의 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설보다 1979년 니폰 애니메이션에서 만든 시리즈 <빨간 머리 앤>을 먼저 접했다. 소설 번역본은 1996년 시공사에서 나왔다. 드라마로는 캐나다 공영 방송 CBC가 방영한 <그린 게이블스의 앤>(1985~2008)과 CBC와 넷플릭스가 공동 방영한 <빨간 머리 앤>(2017~2019)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특히 2017년 CBC가 제작하고 넷플릭스가 배급한 2017년 판 <빨간 머리 앤>에 주목했는데, 기존 주인공 '앤'과 180도 바뀐 인물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사랑스러운 앤으로 그렸다면, 여성 참정권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부딪치면서 성장하는 앤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지금까지의 앤은 긍정적이고 똑똑해서 호감 가는 소녀였고, 독자들은 자신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면서 앤에 대한 선망을 키웠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앤은 말한다. 이 사회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부딪치고 싸워나가야 하는 일이라고."

넷플릭스에 2017년부터 방영된 〈빨간 머리 앤〉예고편. /갈무리
넷플릭스에 2017년부터 방영된 〈빨간 머리 앤〉예고편. /갈무리

특히 저자는 소녀 취향을 내재한 여성의 시각이 사회로 확장되는 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여성의 정체성 고민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 주변부에 대한 고민과 만나기 때문이다.

"여성 해방을 위한 여성들의 연대는 동일한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 결집했을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방법론으로 다양한 방식의 실천을 하며 각계각층의 경험들이 모일 때, 그러한 다양한 입장들에 대한 서로의 이해를 통해서 각자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연대와 진정한 해방은 가능해질 것이다."

tvN에 방영됐던 〈갯마을 차차차〉의 한 부분. /갈무리
tvN에 방영됐던 〈갯마을 차차차〉의 한 부분. /갈무리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보건교사 안은영>을 다뤘으면 좋았겠다 싶다. 정세랑 작가가 2015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인데, 이경미 감독이 연출해 2020년 9월에 넷플릭스에서 6부작 드라마로 선보였다.

이 감독은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로 독특한 시선을 담았다는 평을 듣던 감독이다. 정세랑 작가, 이경미 감독, 안은영 역 정유미 배우 이 세 사람만으로도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었다. 한동안 작품에 등장하는 '젤리' 캐릭터와 음악이 인기를 끌었다.

이 외에도 저자의 시선으로 만나고 싶은 여성 서사 작품은 많다. 박경리 소설이자 대하드라마로도 방송된 <토지>,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등 주로 여성이 시대에 저항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간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자신을 성장시킨 여성 서사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온전히 수용하고 표현하라고 말한다. 소녀 취향의 '유치함'에 담긴 저마다의 주체성을 찾아내는 게 독자에게 던져진 숙제다. 230쪽. 산지니. 1만 8800원.  

/주성희 기자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