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출신 거제 칠천도 김성량 해녀
독도 원정 물질 가장 행복한 기억
2001년 아들따라 거제 정착
"힘 될때까지 물질할 터"

지난 14일 거제시 하청면 칠천로 연구마을에 있는 작은 항구. 오후 6시 즈음 들어선 배에서 해녀 7명이 내린다. 그들은 해삼 20kg이 담긴 통 18개를 뭍으로 옮겼다. 집에 갈 채비를 서두르는 그들 중에서 가장 체구가 작은 이가 김성량(79) 해녀다. 140cm가 조금 넘는 그는 제주에서 태어나 독도에서 물질했고, 현재는 거제 칠천도 바다를 터전으로 삼고 있다.

거제 칠천도 김성량 해녀. 그는 독도에서 물질하며 육지로 나왔다./거제해녀아카데미
거제 칠천도 김성량 해녀. 그는 독도에서 물질하며 육지로 나왔다./거제해녀아카데미

◇독도 원정 물질 시절 = 제주 해녀들이 독도에서 물질을 하기 시작한 건 1935년이다. 독도는 특히 미역이 지닌 상품적 가치가 뛰어났다. 독도 어장을 경험한 사람들은 해방 후에도 그곳에서 미역을 땄다. 제주 해녀들이 독도에서 일했던 상황은 제주도 한림읍 협재리 부녀회가 1956년 세운 '울릉도 출어 부인 기념비'에 잘 드러난다. 이 비석에는 어린 해녀들이 독도에서 번 돈을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마을에 기부했다는 내용이 있다.

김 해녀도 18살부터 독도에서 물질을 했다. 미역 채취가 한창인 3월부터 석 달 정도 섬에 들어가 생활하며 일하는 방식이었다. 1981년 주민등록을 독도로 옮기고 우리나라 최초로 독도 주민이 된 최종덕 씨가 바로 김성량 해녀와 계약한 선주였다. 그렇게 한번 다녀오면 대략 30만 원을 받았다. 자장면 한 그릇이 35원쯤 했으니, 독도 원정 물질은 집안 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 

당시 경찰 독도경비대가 동도를 지켰고 민간인들은 서도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물질할 때가 오면 독도 서쪽 동굴 안에 목재와 철재로 천막을 쳤다. 천막에는 어린 해녀 10여 명과 미역을 손질하고 말리는 등 작업할 남자 20여 명이 함께 살았다. 혈기 왕성한 어린 해녀들이 일을 끝내고 그 안에서 말뚝박기를 하며 뛰어놀았다니 그만큼 크고 튼튼했던 천막이었다.

목이 마르면 굴 안에 흐르는 용천수를 떠 마셨다. 특이하게 갈매기 알을 다양하게 활용했다. 달걀보다 2배 정도 더 컸는데, 이것으로 머리를 감고 빨래도 했다고 한다. 갈매기 알을 쓰면 짠물로 머리를 감아도 머릿결이 비단처럼 고와졌다. 이것으로 빨랫감을 치대면 때가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먹을 게 떨어졌을 때도 알을 삶아 먹었다. 식량은 떨어졌는데, 기상악화로 물질조차 나가지 못하는 날엔 허리에 밧줄을 묶곤 동도로 헤엄쳐 갔다. 순경들에게 밧줄을 던지면 해녀들을 끌어올려 주었는데, 그렇게 겨우 밥을 얻어 먹기도 했다.

김 해녀는 독도 바다만큼이나 맑았던 청춘 시절, 또래 친구들과 일하고 놀며 정을 나눴던 그 시간이 물질 60여 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김성량 해녀가 테왁을 들고 바위에 앉아 있다./거제해녀아카데미
김성량 해녀가 테왁을 들고 바위에 앉아 있다./거제해녀아카데미
지난 14일, 물질을 마친 김성량 해녀가 카메라를 바라보고 웃고 있다. 그는 기자가 "독도에서 물질하던 때를 생각해 보세요!"라고 말하자 활짝 웃었다./백솔빈 기자
지난 14일, 물질을 마친 김성량 해녀가 카메라를 바라보고 웃고 있다. 그는 기자가 "독도에서 물질하던 때를 생각해 보세요!"라고 말하자 활짝 웃었다./백솔빈 기자
거제 칠천도 해녀들이 타고 다니는 배. 그들은 바다 한가운데로 배를 타고 나가 물질을 한다./백솔빈 기자
거제 칠천도 해녀들이 타고 다니는 배. 그들은 바다 한가운데로 배를 타고 나가 물질을 한다./백솔빈 기자

◇거제에 정착하기까지 = 김 해녀는 독도와 울릉도를 오가며 해산물을 땄다. 제주도 밖 외지로 나가 물질을 하는 해녀를 '출가해녀'라고 한다. 당시 이들이 워낙 일을 잘하다 보니 자원 고갈을 막는다는 이유로 원정 물질을 금지 당했다. 1972년부터는 울릉도 주민과 결혼하거나, 주소가 울릉도인 해녀만 독도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잠시 물질을 그만두고 남편, 아이들과 함께 부산에서 살았다. 다시 바다에 나간 건 1980년대 들어서다. 버스 기사였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일을 그만둬야 했다. 그는 남편을 대신해 고성, 통영 매물도, 경북 포항 구룡포 등 여러 바다에 뛰어들었다.

물질을 하다 보면 위험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육지는 찻길과 인도가 따로 있지만, 바다는 뱃길과 사람길이 나눠져 있지 않다. 김 해녀는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줍고 물 위로 올라간 순간 배를 맞닥뜨린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배 밑면에 등을 바짝 붙이고 모터에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다 겨우 빠져나왔다. 더 위험했던 적도 있다. 1996년 물속에서 일을 하는데 수압 때문인지 자꾸 눈이 아프고 부었다. 알고 보니 뇌종양이 생긴 거였다. 서둘러 서울에서 큰 수술을 받았다. 조금만 더 늦으면 큰일 날 상황이었다. 이후 5년간 물질을 할 수 없었다.

2001년 아들 가족이 거제도에 터를 잡았다. 김 해녀는 손녀 학비도 보탤 겸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그는 물질할 힘이 있는 한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오늘도 바다로 나간다.

"부모, 자식, 손주들까지 물질해서 먹여 살렸어. 내 손으로, 내 힘으로 다 했지."

/백솔빈 기자

 

※ <경남도민일보>는 경남 지역 해녀 한 분 한 분의 삶을 소중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혹은 주변에 물질 하는 해녀가 계시면 백솔빈 기자(010-7633-0583)에게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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