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수간산 간인간세 - 남강을 다시 읽다
(5) 함양 남계서원과 세계문화유산

남강 상류는 개평마을을 지나면서 이제 남계천(溪川)으로 불린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남계서원(溪書院)은 남계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나 관료들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중국인인 공자를 모시는 문묘에 배향되는 일이었다. 조선이 '중화(中華)사상을 중시하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중화사상은 중국 천자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움직이고, 조선이나 주변 국가들은 항성인 태양 주변을 맴도는 위성처럼 그 운행체계에 복속된다는 생각이다. 중화사상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한나라 이후 유학(儒學), 그 가운데서도 성리학이 핵심이었다. 그래서 조선에 중국을 많이 닮았다는 '소중화(小中華)'라는 평은 아주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남계천의 상류인 화림동 계곡. /김석환 교수 
남계천의 상류인 화림동 계곡. /김석환 교수 

◇왕보다 높았던 중국 권위 =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조선 사대부들에게 충성의 최종 대상은 왕이 아니라 중국 천자였다. 조선 왕은 중국 천자의 책봉을 통해서만 신하들에게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후금을 치기 위한 명나라의 파병 요청에 광해군이 거부하려 하자 신하들이 "차라리 전하에게 죄를 범할지언정 천자에게는 죄를 범할 수 없다"고 대든 것이 그 사례이다.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반대한 가장 큰 이유도 중화 문화를 흠모하고 큰 나라를 섬기는 '모화사대(慕華事大)'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와 함께 모셔지는 것이 최고 영예였고 왕의 공신으로 종묘에 위패가 안치되는 것은 다음 순위였다. 종묘배향은 조선 시대 관료들의 꿈이었다. 종묘 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최고의 가문으로 존중되고, 그 후손들은 국가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종묘배향을 둘러싸고 조선 왕조 내내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의 예를 들면, 선조의 배향공신은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과 퇴계 이황 등 2명뿐이었다. 율곡 이이는 이준경, 이황 배향 276년 뒤인 1886년(고종 23) 나라가 기울어가던 시절, 인심 쓰듯이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지켜 낸 유성룡과 이순신 등 전쟁 영웅들은 선조의 가장 중요한 공신이 아니었다. 종묘배향으로만 따지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도 순종의 충신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삼년상이 끝난 1928년, 이완용도 송근수, 서정순 등과 함께 순종 배향 공신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완용의 아들이 조선총독부에 작업해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남계서원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9곳 서원 중 한 곳이다. /김석환 교수
남계서원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9곳 서원 중 한 곳이다. /김석환 교수

◇조선 최초의 민립 서원 = 양반이나 벼슬하지 못한 선비들의 문묘와 종묘 다음 영예는 서원에 배향되는 것이다. 남계서원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남계서원은 1445년(중종 37)에 건립된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 1550년(명종 5)의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이은 조선의 세 번째 서원이다. 하지만, 벼슬아치인 주세붕이 세운 소수서원과 문헌서원이 관립 서원이었다면 남계서원은 지역의 유림이 주도한 조선 최초의 민립 서원이다. 동시에 안향, 최충 등 고려 유학자가 아닌 조선조 유학자를 모신 최초의 서원이기도 하다. 민간 주도라서 비용 문제로 공사 기간도 오래 걸렸다. 1552년(명종 7)에 시작해 1559년(명종 14)에 사당이 건립돼 1561년(명종 16)에 정여창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일두 정여창은 그렇게 조선 시대 유학자로는 최초로 서원에 모셔지는 인물이 되었다. 

함양의 남계서원은 이후 조선 시대 서원 건축의 전범이 되었다. 남계서원은 급한 경사지의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을 두고 사당에서 출입문까지 건물들을 일직선으로 배치했다. 앞에는 학업을 위한 강당 등의 공간을 만들고, 뒤에는 사당을 건립하는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이다. 중국의 백록동서원을 벤치마킹한 경북 영주 소수서원의 사례에서 보듯 한국의 서원은 기본적으로 중국 서원을 모방해 만들었다. 하지만,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명나라 이후 중국 서원이 기본적으로 관료 양성을 위한 '공무원 시험 준비학원'이라면 조선 시대 서원은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사립 중등교육 기관, 사립대학의 성격이었다. 동시에 조선 서원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종교시설이기도 했다. 동시에 지역 내 지식인들의 공론 형성을 위한 장소이기도 했다. 남계서원은 이렇게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향교는 서원과 유사한 기능이지만 나라에서 현 단위로 하나씩 세운 공적 성격의 교육기관이다. 성균관은 최고 교육기관이었지만 한양에만 있었다.

◇유네스코에서도 가치 인정 = 2019년 유네스코가 함양 남계서원과 경북 영주 소수서원, 안동 도산서원, 병산서원 등 9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조선 서원만의 고유한 차별성을 인정했다. 유네스코는 문화유산 지정 이유로 "조선의 서원들은 성리학 가치에 들어맞는 지식인을 양성했고, 지역의 대표 성리학자를 사표로 삼아 제사를 지냈고,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했다"고 평가했다. 또 "신청 유산이 기능과 배치, 건축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겪고 토착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도 꼽았다. 유네스코는 이 두 가지 점에서 조선의 서원이, 문화유산 등재기준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1921년 후손들이 건립한 청계서원. /김석환 교수 
1921년 후손들이 건립한 청계서원. /김석환 교수 

지금의 지역 사립대학 역할을 했던 서원의 유지와 교육 활동에는 당연히 비용이 수반된다. 가장 주된 경제적 기반은 서원 소유의 논밭과 노비였다. 서원전(書院田)은 관에서 지급받거나, 서원에 모셔진 인물의 후손이나 유림이 돈을 모아 마련했다. 서원전은 면세가 관례였다. 서원의 원생은 초기에는 양반만 될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돈을 받고 평민들을 원생으로 입학시켰다. 요즘으로 치면 기부 입학인데 원생에게는 군역 면제라는 특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원외라는 의미의 액외원생(額外院生)으로 불렸다. 자진해서 서원의 노비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보호의 대가로 서원에 내는 돈이 나라의 세금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서원은 성리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지만, 나중에는 향촌 유림의 근거지이자 당쟁의 중심이 되었다. 서원이 탈세와 탈법의 온상이 되면서 나라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를 보다 못해 칼을 뽑은 것이 흥선대원군이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은 "오늘날 성현의 이름을 팔아서 (서원이) 사람들을 못살게 하는 도적들의 소굴이 된 지 오래됐으니 어찌 놔둘 수 있겠는가?"하면서 전국에 47개만 남기고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윤희면의 <조선 시대 서원과 양반>에 따르면 당시에 서원은 전국적으로 1700여 개에 달했고 안동 한 곳에도 4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목민심서> 표현을 빌리면 "100리쯤 되는 작은 고을에도 서원(사당 포함)이 수십 곳에 이른다"고 할 정도였다. 

◇서원 철폐령에도 명맥 유지 = 남계서원은 전국적인 서원 철폐의 와중에서도 살아남은 서원이다. 남계서원의 생존 능력은 대단했다. 윤희면의 논문 <경상도 함양의 남계서원 연구>에 따르면 함양은 조식과 그의 제자 정인홍의 영향으로 남명학파와 북인 세력의 근거지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북인이 몰락하면서 남계서원은 노론으로 당색을 바꿨다. 더 나아가 한양의 노론계 고위관료들에게 서원 원장직을 맡겼다. 이른바 경원장(京院長)제도다. 서원으로서는 중앙 집권세력과의 연결을 통한 생존 전략이었고, 집권세력 쪽에서 보면 해당 지역 내 자파세력의 확대였다.

대원군이 권세를 잃은 이후에도 서원들이 다시 들어서기는 쉽지 않았다. 최익현 등 유림 세력의 도움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고종은 대원군의 모든 정책을 뒤집으면서도 서원을 다시 짓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현재 남아 있는 많은 서원은 일제강점기에 문중들이 가문을 내세우려고 건축한 것들이다. 남계서원 옆에 있는 청계서원(靑溪書院)도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처형당한 김일손을 기리고자 문중과 후손이 1921년 건립한 것이다. 나라는 망했지만, 조상을 높이는 유교적 관념은 그대로였다.

  /김석환 부산대 석좌교수 전 한국인터넷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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