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중요무형문화제 제25호 영산쇠머리대기 공개행사

소를 형상화한 쇠머리에 각 마을 장군이 섰다. 드디어 함성과 함께 쇠머리 두개가 맞대어진다. 청년들은 있는 힘껏 쇠머리를 민다. 구경꾼들의 함성에  분위기가 더욱 고조된다. 힘 겨루기 끝에 상대편 쇠머리를 밑으로 깔고 더 높이 오른 쇠머리가 이기고 환호성이 터진다. 지난 1일 창녕 영산면 제63회 3.1 민속문화제에서 열린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쇠머리대기 공개행사 중 한 장면이다.

1일 창녕군 영산면에서 열린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쇠머리대기 공개행사./백솔빈 기자
1일 창녕군 영산면에서 열린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쇠머리대기 공개행사./백솔빈 기자

◇유래 = 영산쇠머리대기는 오직 창녕 영산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대보름 놀이다. 동부 마을과 서부 마을로 나뉘어 서까래를 엮고 새끼로 묶어 쇠머리 모양의 조형물을 만들었다. 이를 마을 젊은이들이 메고 공터에서 서로 부딪치게 하여 부서지거나 땅에 먼저 내려앉는 쪽이 싸움에 진 것으로 판정한다. 안동의 차전놀이와 비슷한 형식이나 안동은 동채를, 영산은 쇠머리를 사용하는 게 다르다. 원래 '쇠머리', '쇠머리댄다', '목우전', '나무소싸움' 등 다양하게 불렸는데, 1969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면서 '영산쇠머리대기'로 공식 명칭이 정해졌다.

과거 문헌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명칭 유래가 명확하지 않지만,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산살설(山殺說)이고, 또 하나는 투우설(鬪牛說)이다. 산살설은 영산에 있는 영축산과 작약산(함박산)이 황소가 머리를 맞겨루고 있는 듯한 형체로 보인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두 산에 살기가 서려 있어, 이를 풀어주지 않으면 마을에 탈이 생긴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싸움으로 살기를 풀었다는 이야기다.

투우설은 과거 영산 사람들이 소싸움(투우)을 즐기던 것에서 출발했다. 소싸움을 붙이면 소가 다치는 일이 흔했다. 소가 다치는 건 농민들에겐 큰 손실이었다. 실제 소를 대체할 만한 가짜 소를 만들기 시작하며, 오늘날 '쇠머리' 형태를 갖추게 됐다는 설명이다.

영산쇠머리대기 중 서낭대기. 본격적인 대결을 시작하기 전 몸을 푸는 단계다./백솔빈 기자
영산쇠머리대기 중 서낭대기. 본격적인 대결을 시작하기 전 몸을 푸는 단계다./백솔빈 기자

◇순서 = 영산쇠머리대기는 싸우러 나가는 순간부터가 놀이의 시작이다. 각 마을 쇠머리가 만들어진 데에서 싸우는 곳까지 향하는 걸 '쇠머리가 나간다'고 불렀다. 쇠머리가 나가는 행렬 앞엔 서낭을 모시고 각종 깃발이 서낭대를 뒤따른다. 풍물대가 울리는 풍악 소리에 맞춰 사람들이 자기 마을 쇠머리를 따라간다. 이때, 대장과 중장·소장이 순서대로 쇠머리 꼭대기에 오른다. 꼭대기에 오른 장군들이 장군칼춤을 추며 흥을 더한다.

그렇게 몇 바퀴를 돌곤 서낭대기를 준비한다. 서낭대기는 본격적으로 쇠머리를 대기 전에 몸을 푸는 단계이다. 동서 양쪽에서 각 마을 서낭대를 요령껏 맞부딪친다. 서낭대가 땅에 떨어지거나 부러지면 지는 것이다. 이긴 팀은 사기가 충천하고, 진 팀은 마음을 다잡는다. 원래 서낭대기는 무당이 직접 서낭대를 흔들어 굿하며 시작됐다고 한다. 서낭대기가 끝나면 진잡이 놀이가 이어진다. 진잡이 놀이는 서로 기세를 과시하는 놀이이다. 작은 깃발을 든 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상대편 쇠머리를 휘감아 돈다. 

이 모든 순서를 마치면 드디어 결전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쇠머리를 부딪치진 않는다. 쇠머리 어르기가 남았다. 쇠머리를 메고 한참 동안 관중 분위기를 띄운다. 쇠머리를 추켜올렸다가 늦추고, 늦췄다가 추켜올리며 능청스럽게 애간장을 태운다. 한참을 어르다 다시끔 자리를 잡고 선다. 대장이 '전진하라!' 외치면 각 쇠머리 간 거리를 빠르게 좁힌다. 쇠머리가 쾅 부딪치자 쇠머리를 잡은 이들이 전력을 다해 밀기 시작한다. 줄다리기가 당기는 힘으로 판결 난다면, 쇠머리대기는 미는 힘이 중요하다.

영산쇠머리대기를 구경 중인 창녕 군민들./백솔빈 기자
영산쇠머리대기를 구경 중인 창녕 군민들./백솔빈 기자

◇의미 = 쇠머리대기 놀이는 늘 마을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노릇을 했다. 놀이를 할 때뿐만 아니라 준비 과정부터 마을 주민들의 단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거엔 쇠머리를 한 달 동안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에는 머리 높이가 460cm, 어깨 부분 가로 길이가 480cm, 몸통 길이는 500cm로 정해져 있는데, 옛날에는 지금보다 5배는 더 컸다고 주민들은 증언한다.

놀이를 구경하던 영산 토박이 서성수(81·창녕군 영산면) 어르신이 기억을 더듬는다.

"쇠머리대기를 하면 마을 단합이 참 잘됐어요. 지금은 쇠머리 크기가 많이 작아졌는데, 옛날엔 정말 컸어요. 마을 사람들은 그 큰 쇠머리를 만들고자 한 달 동안 다 같이 공들였죠. 쉽게 들 수 있도록 소나무를 베고 껍질 벗겨 말렸어요. 너무 말리면 쉽게 부서지니 적당히 말려야 했어요. 많은 정성이 필요했던 거죠."

조대권 영산쇠머리대기 명에보유자./백솔빈 기자
조대권 영산쇠머리대기 명에보유자./백솔빈 기자

경기를 할 때도 마음을 맞대는 게 중요하다.

이번 놀이에 참여한 제창현(22·경상국립대) 씨는 "쇠머리대기는 인공적인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며 "좌우로 균형을 잘 맞추고 알맞게 힘 배분을 해야 하기에 마음을 맞대는 게 가장 중요했다"는 소감을 말했다.

조대권(78) 영산쇠머리대기 명예보유자도 단합력이 이 놀이의 핵심이라 말했다.

"이 놀이는 사람들 간 갈등이 있다가도 화해하고, 다른 마을 사람들과도 화합할 수 있는 게 만듭니다. 결국, 이 놀이에 참여하고 구경한 사람 모두를 하나 되게 만들죠. 그래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솔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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