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앞바다를 관음포라 부른다. '관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에서 따온 이름이다. 관음보살은 대자대비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성자다. 관음포는 고려 말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정지(1347~1391) 장군의 '관음포대첩'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지역은 불교와 관련이 깊다. 학자들은 고려시대 위대한 역사(役事), 고려대장경 판각(나무에 새기는 일)을 관음포 일대에서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옛 관음포는 뭍으로 깊숙이 들어온 바다였다. 적어도 지금 고현면 탑동마을 앞까지는 바다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갯벌이 매립됐는데 관음포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이 관음포에서 정유년(1598년) 11월 18~19일, 조선과 명나라 연합 수군 그리고 일본 수군 사이에 치열한 해상 전투가 벌어졌다. 노량해전이다. 지금 극장에서 한창 관객을 만나고 있는 이순신 3부작 마지막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는 바로 이 해전을 그린 작품이다.

남해 이순신순국공원은 노을 명소다. 주차장 쪽에서 본 관음포가 붉게 물들고 있다. 노량해전 때도 이렇게 노을이 졌을까. /이서후 기자 
남해 이순신순국공원은 노을 명소다. 주차장 쪽에서 본 관음포가 붉게 물들고 있다. 노량해전 때도 이렇게 노을이 졌을까. /이서후 기자 


쓰러진 이순신을 기리다

노량해전은 임진년(1592년)에 시작해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일본군은 임진왜란을 시작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군을 계획한다.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 이순신은 굳이 돌아가려는 일본군의 퇴로를 막는다. 조선을 짓밟은 원수들을 단 한 명도 살려 보내기가 싫었다. 노량해전에 앞서 이렇게 기도한다. "이 원수들을 다 없앤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노량 앞바다에서 조명 연합 수군에 막힌 일본 수군은 남쪽 큰 바다를 향해 배를 돌린다. 하지만 그들이 큰 바다로 생각했던 건 바로 관음포였다. 관음포에 갇혀 궁지에 몰린 일본군은 결사적이었다. 이 와중에 이순신이 유탄을 맞고 쓰러진다. 그의 최후였다.

남해 관음포 이순신전몰유허에 있는 이락사 입구. 이순신 장군이 쓰러진 후 뭍으로 옮겨졌다고 추정되는 곳에 후손이 세운 사당이다. /이서후 기자  
남해 관음포 이순신전몰유허에 있는 이락사 입구. 이순신 장군이 쓰러진 후 뭍으로 옮겨졌다고 추정되는 곳에 후손이 세운 사당이다. /이서후 기자  
남해 관음포 이순신전몰유허에 있는 이락사 현판. 대성운해는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는 뜻이다. /이서후 기자  
남해 관음포 이순신전몰유허에 있는 이락사 현판. 대성운해는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는 뜻이다. /이서후 기자  

관음포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등성이를 이락산이라 부른다. 이순신이 유탄에 맞아 숨진 후 뭍으로 옮겨졌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등성이 초입에 이락사가 있다. 이락사는 한자로 '李落祠'라 쓰는데 '이순신이 순국한 것을 기리는 사당' 정도로 보면 되겠다. 들머리 큰 비석에 다음과 같은 한자가 새겨져 있다. "戰方急 愼勿言我死(전투가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쓰러진 이순신이 유언처럼 남긴 말이다.

1832년 이순신의 8세손 이항권이 통제사로 부임해 유허비와 비각을 세운 후 이락사로 이름을 지었다. 아담하고 단정한 사당으로 묵직하고 단단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특히 입구 앞 키 큰 소나무 대열은 굵고 우직했던 이순신의 성정을 상징하는 듯하다. 현판은 '이락사'와 '대성운해(大星隕海·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 두 개가 있는데, 모두 박정희 대통령이 적은 것이라 한다.

이락사 오른편으로는 솔숲 사이로 첨망대(瞻望臺)로 가는 길이 나 있다. 1991년 세운 것으로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관음포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500m 남짓 걸어 첨망대로 가는 길 자체도 호젓하고 깔끔해 좋다. 이락사에 있는 이충무공 유허비와 비각, 이충무공 전적비, 첨망대 등 이락산 일대를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라 하는데, 국가 사적 제232호로 지정돼 있다.


노을이 멋진 이순신순국공원 

이락사와 첨망대까지 보고 돌아 나오면 왼편으로 커다란 배 모양 건물이 보인다. 용머리가 없어 판옥선인가 했는데, 상판이 덮인 모습이 귀선(龜船), 즉 거북선이다. 남해군이 지난 2008년 12월 개관한 이순신 영상관이다. 영상관 내부에 138석을 갖춘 돔형 입체 상영관이 있다. 여기서는 정시마다 노량해전을 다룬 영상 <노량 불멸의 바다>를 상영한다. 이외에도 전시관에는 이순신의 삶과 임진왜란 전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여기서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위 이순신 영정도 눈여겨보자. 현재 이순신 표준영정은 1953년에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으로 관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영상관에 있는 영정은 구군복(具軍服·조선시대 무관이 입던 복장)을 하고 있다. 이는 서양화가 정형모 화백이 1978년 장군의 본관인 덕수 이씨 50대 남자를 수없이 관찰해 그린 것이라 한다.

남해 이순신바다공원 내 이순신영상관 전경. /이서후 기자  
남해 이순신바다공원 내 이순신영상관 전경. /이서후 기자  
이순신영상관에 있는 서양화가 정형모가 그린 이순신 영정. /이서후 기자 
이순신영상관에 있는 서양화가 정형모가 그린 이순신 영정. /이서후 기자 

영상관을 포함한 주변은 이순신바다공원이다. 남해군이 9만㎡ 터에 280억 원을 들여 공사해 2017년에 완공한 역사공원이자 문화공원이다. 영상관을 포함해 공원 내 관련 조형물과 대형 벽화 등으로 공원을 거닐며 이순신 장군을 추모할 수도 있도록 했다.이순신 장군이 바다로 진 곳이라 그런지, 이곳에서 보는 관음포 일몰이 멋지다. 주차장과 함께 상점 등이 있는 쪽은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각종 놀이터와 공연장 등이 마련돼 가족 나들이를 더욱 즐겁게 한다.


이순신의 혼이 지키는 마을

이순신바다공원을 둘러보고 나면 남해바래길 14코스 이순신호국길을 따라 걸어보자. 전체적으로는 남해군 서면 중현리 새남해농협 중현지소(하나로마트)에서 시작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를 지나 설천면 노량마을 노량선착장까지 이어진다. 이 중 관음포에서 시작해 노량선착장 지나 남해 충렬사에 이르는 길은 지난 2012년 남해군이 마련해 놓은 '이순신 호국길'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 길은 이순신의 유해가 육지로 올라와 충렬사까지 운구되는 과정을 따라 간다. 역사적으로 이순신의 '마지막 가는 길'이기도 하다. 길 곳곳에 이순신 어록을 담은 입간판이 서 있다.

이순신바다공원 내 노량해전 전몰 조명 연합수군 위령탑. 왼쪽은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 신위, 오른쪽은 등자룡 장군과 명나라 병사 신위다. /이서후 기자  
이순신바다공원 내 노량해전 전몰 조명 연합수군 위령탑. 왼쪽은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 신위, 오른쪽은 등자룡 장군과 명나라 병사 신위다. /이서후 기자  
남해 이순신바다공원 이순신동상 너머 관음포가 붉게 물들고 있다. /이서후 기자 
남해 이순신바다공원 이순신동상 너머 관음포가 붉게 물들고 있다. /이서후 기자 
이순신바다공원 대형 벽화 중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맞이한 장면을 표현한 부분. /이서후 기자 
이순신바다공원 대형 벽화 중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맞이한 장면을 표현한 부분. /이서후 기자 
남해대교에서 본 남해 충렬사와 거북선. 바로 앞에 있는 바다가 노량해협이다. /이서후 기자 
남해대교에서 본 남해 충렬사와 거북선. 바로 앞에 있는 바다가 노량해협이다. /이서후 기자 

종착지 노량마을은 실제 노량해전이 시작된 곳이자 '충무공의 혼'이 지키는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남해에도 들어왔지만, 이상하게도 당시 교통 요충지였던 노량마을에는 살지 않았다고 한다. 또, 노량에는 순사가 머무르는 주재소가 있었는데, 순사가 발령나 오기만 하면 미치거나 병이 들어 곧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런 전설은 모두 이곳에 있는 충렬사에서 비롯된다. 충렬사는 관음포 앞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시신이 남해를 떠나기 전 임시로 매장된 곳에 세워졌다. 충무공이 떠난 지 30년 후 1628년 남해 사람 김여빈과 고승후가 이 자리에 사당을 세워야 한다고 주창했고, 그로부터 다시 5년 후 초가로 된 1칸짜리 사당이 세워진다. 당시 사람들은 이순신을 충민공(忠愍公)이라 불렀다. 충무공이란 시호는 이로부터 10년 후에나 받게 된다. 충렬사 주변은 아름드리 벚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두려움 탓일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충렬사를 없애지는 못하고 벚나무로 둘러싸 버린 까닭이다.

매년 봄 충렬사 주변은 일본인들이 심은 벚꽃으로 가득찬다. 많은 관광객이 이 벚꽃을 구경하러 남해 노량을 찾는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이서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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