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언어 쉽게 고쳐보기 첫 순서는 박물관 전시 설명입니다. 창원에서 활동하는 김달님 작가와 송지원 KBS창원 아나운서는 제일 먼저 국립김해박물관 상설 전시실을 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지역을 대표할 만한 박물관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국립김해박물관 신광철 학예사의 안내로 전시실을 둘러보며 차근차근 설명을 듣고 보니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해박물관은 전시 설명이 아주 쉽게 잘 돼 있어서 고칠만한 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적당한 박물관을 찾다가 의령에 있는 의병박물관 전시 설명을 선택했습니다.

먼저 이야기하지만, 의병박물관 전시 설명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전시 설명을 쓴 분은 전문 지식을 갖추고 나름 핵심을 짚어 설명하려고 애를 썼을 겁니다. 단지 우리는 쉽게 쓴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 고쳐본 겁니다. 애초 전시 설명으로 보여주려 했던 핵심을 벗어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구체적으로 이번 박물관 공공언어 쉽게 쓰기 대상은 의병박물관 전시 설명 중 '의령 지역의 의병 활동' 일부 내용입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령은 지리적으로 서북쪽은 산으로 막히고 동남쪽은 낙동강과 남강의 두 강이 형승을 이룬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곳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의령사람들의 습성에 대해 '습속이 굳세고 용맹함을 숭상한다' 라고 하였다. 의령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 괄목할 만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지역민의 성향 등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년 의령지역의 의병 활동은 곽재우의 창의 초기만 하더라도 주로 낙동강과 남강수계를 따라 의령지역을 자체 방어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최초의 곽재우의 창의에 가담한 사람은 심대승·권란·장문장·박필 등 10여명이었으며, 이후 의령지역 의병의 활약으로 임진년 7월 무렵이 되면 삼가현의 군사까지 합류하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곽재우와 그 휘하 17장의 군무가 분장 된다. 대장 윤탁은 용연에 주둔하고, 선봉장 심대승은 장현, 기찰 심기일은 정호, 복병 안기종은 유곡, 수병장 이운장은 낙동강 서편, 돌격장 권란은 옥천대, 수병장 오운은 백암, 곽재우는 유곡 세간에서 전군을 통제하였다. 낙동강에서 남강의 정암에 이르기까지 60리 사이에는 정찰대가 총총히 배치되어 활동하였다. 의령의 의병부대는 지형, 지물과 뛰어난 전략으로 연전연승하였으며, 1594년 계사년에 경상우도가 곽재우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활동 영역은 경상우도와 창녕·영산·현풍 등 일부 경상좌도까지 확대되었다.


박물관 공공언어 고쳐보기 대상으로 삼은 의령 의병박물관 전시 설명. /이서후 기자
박물관 공공언어 고쳐보기 대상으로 삼은 의령 의병박물관 전시 설명. /이서후 기자

김달님 작가와 송지원 아나운서는 먼저 각자 일주일 정도 시간을 두고 문장을 여러모로 살펴보고 새로 다듬어봤습니다. 그러고 나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정리를 했습니다. 아무래도 한자 세대가 아니어서인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게 한자 뜻 찾기였다고 합니다. 한자 뜻을 몰라서 사전을 찾아보면 그 설명마저도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어 스스로 '한자 바보'란 생각마저 들더랍니다. 원문에서 '습속이 굳세고 용맹함을 숭상한다'는 부분을 볼까요. 특히 '습속이 굳세다' 이 말의 느낌은 알겠는데, 이걸 쉽게 풀어쓰는 게 힘들었지요. 이렇게 한자를 더 쉽게 표현하려고 의논하는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대체로 문장이 길다는 데도 둘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또 한자 뜻 그대로 직역해야 할지, 어느 정도 의역해야 할지도 고민이었습니다. 지나친 의역은 전문가인 글쓴이가 의도한 정보를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여기에 괄호 안에 '짧고 간단하지만, 세심한' 부연 설명도 붙여봤습니다. 그리고 예컨대 경상좌도나 우도 등 현대인이 바로 알기 어려운 개념은 각주로 설명을 덧붙이면 좋겠다고 의견을 나눴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래와 같은 글이 나왔습니다.

지난 13일 창원 한 카페에서 박물관 전시 설명을 두고 의논하는 김달님 작가와 송지원 KBS 아나운서. /이서후 기자
지난 13일 창원 한 카페에서 박물관 전시 설명을 두고 의논하는 김달님 작가와 송지원 KBS 아나운서. /이서후 기자


 


의령은 과거부터 풍경이 뛰어나고 풍수가 좋았다. 서북쪽은 산으로 막히고 동남쪽은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했다. 조선 성종 때 쓰인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의령 사람들이 '의지가 굳세고 용맹함을 숭상한다'라고 했다. 의령에서 의병이 일어나 뛰어난 전투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데는 지리적 특성과 함께 의령 사람들의 이러한 성향도 작용했을 것이다. 임진년(1592년) 곽재우가 처음 의병을 일으킨 때만 하더라도 의병 활동은 주로 낙동강과 남강을 따라 지역을 방어하는 일에만 집중됐다. 가장 먼저 곽재우와 함께 의병 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심대승·권란·장문장·박필 등 10여 명이었다. 이후 의령지역 의병의 두드러진 활약으로 임진년 7월 무렵이면 삼가현(현 합천군 삼가면) 군사까지 합류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곽재우 장군의 지휘 아래 우두머리 17명이 각각 역할을 나눴다. 대장 윤탁은 용연에 주둔하고, 선봉장 심대승은 장현, 기찰 심기일은 정호, 복병 안기종은 유곡, 수병장 이운장은 낙동강 서쪽, 돌격장 권란은 옥천대, 수병장 오운은 백암, 곽재우는 유곡 세간에서 모든 군사력을 통제하였다. 낙동강에서 남강 정암까지 60리(약 20㎞)에 정찰대가 촘촘히 배치됐다. 의병은 지리에 익숙하고 향토 조건에 알맞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기에 전투마다 이길 수 있었다. 1593년 계사년에 경상우도 전체 병력이 곽재우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활동 영역도 창녕·영산·현풍 등 일부 경상좌도까지 확대되었다.


 /이서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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