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의사 표현 돕는 그림·단어 책자 2년째 제작 보급
청소년도 성인도 물건 구매서 택배 발송까지 혼자 가능

일상에서 말하고 듣는 게 당연한 이들이 있다. 비장애인들은 필요한 물건을 살 때도, 적절한 생각을 표현할 때도 상호 동의한 언어를 사용해 의사소통한다.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행위지만 비장애인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장애인들에게는 외출을 꺼리게 하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비장애인들이 쓰는 언어가 있듯이 장애인들에게도 세상과 소통할 적절한 언어가 필요한 이유다. 창원대 특수교육과는 지난해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각자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중간지대를 만들어 오고 있다. 의사소통 도움 그림판인 'AAC(보완·대체 의사소통) 체계' 제작이다. 창원대 특수교육과는 이를 지역사회에 본격적으로 보급하려 한다.

창원대학교 특수교육학과 1·2학년 학생들이 한경임 교수와 함께 AAC체계를 활용한 의사소통 도움 그림·글자판을 제작하고 보급했다.  /주성희 기자
창원대학교 특수교육학과 1·2학년 학생들이 한경임 교수와 함께 AAC체계를 활용한 의사소통 도움 그림·글자판을 제작하고 보급했다. /주성희 기자

의사소통 지원하는 AAC, 보급 속도 = 창원대학교 특수교육과는 대학 내 국립대학육성사업단 지원사업으로 'AAC' 체계 제작을 2년째 이어 오고 있다. 1·2학년 학생들과 한경임 교수가 주축이 돼 제작부터 지역사회 보급까지 맡았다.

AAC는 장애인을 비롯해 언어 인지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그림이나 글자를 가리키며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의사소통 지원 체계다. 창원대 특수교육과가 제작해 보급하는 AAC 체계는 말로 의사소통하기 어려운 장애인부터 노인·아동 등이 손짓과 눈짓만으로도 손쉽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그림·상징으로 다양한 표현이 포함된 책자다. 

올해는 지난해 제작했던 AAC 의사소통판을 토대로 1년 사이 추가된 어휘나 물건·음식 등의 상징을 새로 넣었다. 또 도서관·행정복지센터 등 새로운 공간에 맞는 AAC 의사소통판을 제작했다.

창원대 특수교육과 2학년 이민령(21)·조우영(20) 씨는 "1년 사이 새로 만들어진 단어 등 달라진 게 많아 적용하는 게 쉽지 않았다"며 "포토샵을 이용해서 직접 상징물을 만들기도 하고 사진을 활용하기도 하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제작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활동 범위도 넓혔다. 지난해는 창원시 성산구 양곡동 일대에서만 AAC를 알렸다면, 올해는 창원시 사림·도계·용호동 일대 사업장을 돌면서 활동했다. 

창원대 특수교육과 2학년 남채윤(23) 씨는 "AAC가 지역사회에 더 많이 보급돼서 장애인들이 마트나 공공기관 등을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그러면 장애라는 벽도 허물어지고 단지 대화가 조금 어려운 사람 정도로 인식되지 않을까 싶다"고 전했다.

한경임 교수는 "장애인이라고 하면 시설에만 있거나 집에만 있게 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건 안전을 명목으로 장애인을 가두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AAC라는 수단이 이들을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돼 이들이 실패도 해보는 등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좋은 취지로 시작한 사업이지만 예산 부족과 낮은 인지도 등 한계도 뚜렷하다. 

창원대 특수교육과 2학년 조해성(21) 씨는 "비장애인들뿐만 아니라 장애인 중에서도 AAC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게 사실"이라며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한 홍보나 장애인 인플루언서와 협업으로 AAC를 알리는 방안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현실에서는 '장애인들이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라는 생각이 여전히 팽배하다"면서 "이럴 때일수록 지자체에서 먼저 장애인들의 의사소통에 관심을 두고 전담 부서 신설 등 예산을 적극적으로 투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AAC를 배운 장애인들은 누구보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며 "본인 의사를 표현하면 문제행동도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심민건(가운데) 군이 지난달 11일 창원에 한 편의점에서 AAC의사소통판을 이용해 과자를 구매하려고 하고 있다. 한경임 창원대학교 특수교육학과 교수(오른쪽)와 특수교육과 학생들이 이를 돕고 있는 모습. /주성희 기자
심민건(가운데) 군이 지난달 11일 창원에 한 편의점에서 AAC의사소통판을 이용해 과자를 구매하려고 하고 있다. 한경임 창원대학교 특수교육학과 교수(오른쪽)와 특수교육과 학생들이 이를 돕고 있는 모습. /주성희 기자

◇"일상에서도 쉽게 AAC로 대화해요" = 한경임 교수는 올해 AAC 현장 체험 기관으로 아동·청소년이 이용하는 '함께걷는발달연구소'와 장애인직업재활시설 '두레풍장', 창원중앙도서관을 선정했다. 

창원대 특수교육과 학생들이 이 세 기관에 나뉘어 투입됐다. 세 기관 주변 편의점·마트·우체국·행정복지센터·카페·도서관 등에 창원대학교 특수교육센터가 제작한 AAC 의사소통판을 배포·비치했다. 창원대 특수교육과 학생들이 장애인들과 동행해 AAC 사용법을 알리고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게 도왔다.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 '함께걷는발달연구소'에서 활동하는 심민건(18) 군은 사뭇 낯선 이들과 연구소 인근 편의점으로 향했다. 동행자는 조해성(21) 씨와 같은 학과 1학년 강다은(20)·최아린(20) 씨. 편의점에 들어가기 전 당일 결제 수단이 든 목걸이형 카드지갑을 점검했다. 구매 물품도 학생들과 미리 정했다. 

심민건(오른쪽) 군이 지난달 25일 AAC의사소통판을 이용해 커피전문점에서 음료를 구매하고 있는 모습. /주성희 기자
심민건(오른쪽) 군이 지난달 25일 AAC의사소통판을 이용해 커피전문점에서 음료를 구매하고 있는 모습. /주성희 기자

편의점에 들어간 심 군은 AAC 의사소통판을 펼쳐 직원에게 젤리가 있는 위치를 물었다. 이후 젤리와 함께 새우 맛 나는 과자까지 찾아 계산대로 향했다. 직원은 AAC 의사소통판을 이용해 결제 방식을 물었다. 심 군은 카드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카드 결제 후 영수증을 챙겨 들었다. 심 군은 비닐봉지 그림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구매한 물건을 봉지에 담아 연구소로 향했다. 

심 군이 매일 방문하는 '함께걷는발달연구소'는 아동·청소년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는 맞춤형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심리검사, 행동·발달 평가, 운동·언어 재활, 인지·그룹 수업 등 방과 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회적기업이다.

김소형 함께걷는발달연구소 대표는 AAC 의사소통판 제작과 도입을 환영한다면서 "지역 기관 내에 AAC 체계가 있어야 장애인이 지역사회 어디든 오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심 군은 이날 이후에도 AAC를 활용해 쇼핑을 즐겼다. 또 다른 날, 심 군은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 한 커피전문점을 방문했다. 샤인머스캣을 갈아 만든 음료를 주문해 마셨다. 이날은 현금으로 결제했다. 

커피전문점 점주 최보연(43) 씨는 "그동안 고객이 의사소통이 어려우면 차림판에 있는 그림을 가리켜 주문받기도 했다"면서 "AAC를 도입하니 주문 외 요청사항을 수용하고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말했다. 최 씨는 앞으로 심 군이 동행자 없이 방문하더라도 AAC로 주문과 결제까지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이근수 씨가 지난 7월 27일 창원시 의창구 도계동우체국에 방문해 AAC 의사소통판으로 우편을 보내고 있다. /두레풍장
이근수 씨가 지난 7월 27일 창원시 의창구 도계동우체국에 방문해 AAC 의사소통판으로 우편을 보내고 있다. /두레풍장

조우영 씨는 창원시 도계동에 있는 '두레풍장' 내 작업자들과 호흡을 맞췄다. '두레풍장'은 2002년 시작한 장애인보호작업장이다. 주요 사업은 건강식 누룽지 생산과 자동차 부품 임가공 조립이다. 현재 총 17명이 작업에 임하고 있다.

조 씨는 두레풍장 방문 전 큰 변화를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조 씨는 두레풍장을 8회 방문하면서 날마다 발전하는 작업자들을 지켜봤다. 조 씨는 "장애인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며 "마지막 회차에는 나의 도움 없이 AAC로만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모습에 뿌듯했다"고 말했다.

이근수(41) 씨는 2015년부터 두레풍장에서 일해 온 베테랑이다. 두레풍장에서 뭐든 척척 해내는 그도 아직 마트에서 스스로 물건을 구매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이 씨가 올해 7월 AAC를 들고 우체국과 마트 등을 방문했다. 이 씨는 우체국에서 두레풍장이 가공한 누룽지를 발송했다. 마트에서 무엇을 샀냐고 묻자 "하드(아이스크림)"라고 답했다. 이 씨는 AAC를 활용해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 수영하고 싶다는 계획을 전했다.

이근수 씨가 지난달 4일 도계동에 있는 마트에 방문해 AAC 의사소통을 이용해 물건을 구매하고 있다. /두레풍장
이근수 씨가 지난달 4일 도계동에 있는 마트에 방문해 AAC 의사소통을 이용해 물건을 구매하고 있다. /두레풍장

이 씨와 동행한 허예진 두레풍장 운영 담당자는 "AAC 실습 현장에서 사업장 또는 기관 관계자가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면서 "그런 한 사람이 보이는 호의가 장애인에게는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자신감이 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AAC를 지속·발전시키려면 전담 인력과 조직 구성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는 "AAC는 일회성 안내 책자가 아니다"라며 "참여 기관마다 다양한 어휘를 추가하고 개선할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점자를 부착해 시각장애인도 함께 활용하는 등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진정한 사회 통합은 장애인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자유롭게 의사소통하며 지역사회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주성희 박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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