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이라던 가격 더 떨어지는데 수확기 앞 대책 없어
오락가락 정책 농민 헛웃음…"조생종 두 배 매입을"

키운 곡식을 거두기 전 숨을 고르며 즐기는 명절이 가까웠지만 사천에서 벼농사를 짓는 정연정(59) 씨 얼굴에는 시름만 가득했다. 정 씨는 사단법인 한국쌀전업농경상남도연합회장을 맡고 있다.

태풍 '힌남노'가 우리나라를 향해 북상 중일 때 정 씨를 만났다.

얼마나 무지막지한 녀석이 올는지, 끝 간데없는 들녘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너른 들을 무슨 수로 다 감쌀까, 태풍이라는 이름 앞에 예나 지금이나 방도는 없다. 무사히 지나가길 바랄 뿐.

태풍도 태풍이지만, 정씨의 가슴을 더 짓누르는 것은 쌀값이다.

일찍 벼를 심은 논은 한가위를 앞두고 수확이 한창이다. 그러나 쌀값이 떨어지자 창고에는 지난해 수확한 벼 포대가 가득이다. 통계청이 낸 8월 5일, 15일, 25일 20㎏ 산지 쌀값은 각각 4만 3093원, 4만 2522원, 4만 1836원.

2019년과 2020년 4만 7000원대, 2021년 5만 5000원대였던 쌀값은 올해 들어 뚝 떨어졌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던 지난 7월 쌀값도 4만 4000원은 됐었다. 갈수록 형편없이 떨어지는 쌀값, 농민들에게 한가위가 반가울 리 없다.

“수확기가 다다랐는데, 정부는 양곡 창고를 빌려준다네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옮기려면 물류비가 들지 않습니까. 이런 식의 격리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애들도 압니다.”

공공비축미곡 매입가를 내는 뼈대인 통계청 산지 쌀값 통계는 매번 농민 애를 먹인다. 매입가는 수확기인 10~12월 도정한 전국 산지 쌀값 평균을 기준으로 낸다. 통계청은 전국 모든 미곡종합처리장(RPC) 등 370여 곳을 표본으로 삼아 산지 쌀값을 내는데, 물량 가중치를 반영하지 않아 지역과 괴리가 크다.

“물량에서 차이가 많이 납니다. 표본 조사가 잘못됐어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빨리 표본 조사를 해서 이달 15일까지는 발표를 해줘야지. 15일까지는 나와야 과잉 생산이면 농민도 나름대로 적정량에 맞춰서 출하를 하는데…. 자료 자체도 못 믿겠고, 참.”

정부는 수확기 쌀 생산량이 수요를 넘기면 수급을 조절하고자 예상 초과 공급량을 사들여 시장에서 격리한다. 흉작이면 내다 팔 쌀이 모자라고 풍년이면 쌀값이 떨어지는 일이 반복하기에, 이른바 ‘시장격리제’는 농민 생계와 바로 맞닿은 수급 안정 장치다.

현실은 양곡관리법상 시장격리가 의무가 아니다. 따라서 농민들에게는 쌀 생산량이 수요보다 일정 비율 이상 많아지면 자동으로 시장격리가 발동되도록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 처리가 시급하다.

5일 오전 사천시 정동면 한 들녘에서 정연정 쌀전업농경남회장이 정부 쌀값 정책을 성토하고 있다. /황선민 인턴기자 hsm@idomin.com
5일 오전 사천시 정동면 한 들녘에서 정연정 쌀전업농경남회장이 정부 쌀값 정책을 성토하고 있다. /황선민 인턴기자 hsm@idomin.com

가장 큰 시름은 사정이 좋아질 기미는 없고 나빠질 기미만 보인다는 것이다. 한가위 즈음 출하하는 조생종(이른 시기에 자라나는 품종) 벼는 작년 시세만 해도 40㎏ 기준 6만 5000원가량이었는데, 현재 시세로 5만 1000원가량이다.

“조생종 벼값은 수확기에 가격이 형성될 텐데, 5만 원대에서 4만 원대까지 내려가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정부가 특단의 조치로 20만t을 격리하는 것이 시장 안정화를 고려해서라도 취지에 맞습니다.”

최근 농림축산식품부는 연말까지 올해산 쌀 45만t을 공공비축용으로 사들인다고 밝혔다. 이 중 오는 11월 30일까지 수확하자마자 바로 매입하는, 말리지 않은 벼 10만t을 사들일 텐데, 이를 20만t까지 늘리면 당장 급한 불은 어느 정도 끌 수 있다는 것이 정 회장 말이다.

수장이 바뀌거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하는 정책도 문제다. 농민들은 지금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분질미 장관’으로 부른단다. 가루용 쌀로 밀 수요를 대체하겠다는 정책을 내세워서다.

“지금 장관 있을 때만 그리되는 거죠. 다른 장관이 오면 또 바뀌고. 농민은 누가 장관을 하든, 정권을 잡든 꾸준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현장도 모르고 탁상에서 정책을 내리니…. 농업 정책은 5년이 아니라 100년을 내다봐야지. 오죽하면 정책 반대로 농사를 지어야 안 망한다니까.”

쌀 농가 시름이 이어지자 농민단체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최근 성명을 내고 정부에 농민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촉구했다. 농림축산식품부 내년도 예산안은 작년 대비 2.4% 증액인데, 모든 비용이 크게 오른 현재 예상 물가 상승률 6%에도 못 미치는 예산은 사실상 축소와 다를 바 없다는 것.

“45년 만에 가장 크게 떨어진 쌀값으로 올해 농사 한 푼 순소득도 기대 못 하는 상황에 이자와 필수 농자재, 인건비 폭등까지 겹쳐 평생 농사를 지은 농민이 내년 농사를 포기할지를 고민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데도, 농업 예산안에는 대책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조병옥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산경남연맹 의장도 “농림축산식품부 내년도 예산안은 농민 우롱”이라고 지적했다. 떨어지는 쌀값도 잡을 여력이 있을 텐데 의지의 문제, 사실상 농업은 뒷전이라는 것이다.

“작년 쌀 생산량이 338만t인데 35만t을 창고에 들였고 쌀값이 떨어지니까 세 차례 시장 격리를 했지 않습니까. 그럼 나머지 쌀은 시장에 있거나 있었다는 셈인데, 조절할 수 있는 양입니다. 그럼에도, 쌀값이 떨어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죠. 통계가 잘못됐다든지 다른 요인이 있을 텐데 못 찾는 거겠죠.”

정부는 떨어지는 쌀값을 잡겠다며 변동직불제를 없애고 공익형 직불제를 도입했지만 쌀값은 자꾸만 떨어진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양곡관리법을 고쳐 생산비를 보장하는 목표가격제와 필요 예산 확보”를 요구한다.

태풍 힌남노가 할퀴고 지나간 들녘은 어떨까. 7일 전화기 너머로 정 회장은 “걱정과 달리 무사히 견뎌냈다”며 웃었다. 그마저도 잠시, 정 회장은 “정부가 20만t까지 사들이면 얼마나 좋겠느냐”며 재차 말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쌀값 걱정은 태풍도 쓸어내리지 못한 모양이다.

/최환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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