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부족으로 작업 중단 상태
3분의 1가량 남은 늪 관리 안돼
준공허가·민간개발 쉽지 않아

창녕군에는 50년 전까지 우포늪 크기의 자연늪이 하나 더 있었다.

대합면 용호마을에서 산을 끼고 구미마을로, 또 ㄷ자 모양으로 오른쪽 위 목단마을로 이어졌던 용호늪이다. 넓게 잡아 65만 평 규모였던 이 늪에서 32만 평 정도는 그사이 개간이 진행됐다. 인근 용산마을에 사는 이춘자(90) 씨는 지난 1964년 "용호늪 일대 국유지를 개간해서 논으로 만들면 소유권을 넘겨주겠다"는 박정희 정부의 강권에 이웃 30여 가구와 함께 진해에서 이주했던 '용호개척단'의 마지막 현지 생존자다.

"58년 전에 사셨다는 흙집에 안 가 보실랍니꺼?" "뭐 할라꼬.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절이 됐다" 하시더니 "점빵 문 닫고 함 가보까"라며 싱긋이 웃었다. 그렇게 이 씨와 함께 지난달 21일에 50여 년 전의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섰다. 차를 몰고 옥산마을 쪽으로 도는 순간부터 이 씨는 "머시 이리 변했노?" 했다. 홀몸생활에 점빵 지키랴,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나올 일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50여 년 전 물구덩이였던 개간지 대부분이 논밭으로 변해서였을까.

옛 흙집 터에 들어선 절 '관해암' 앞에서 사진을 찍고, 좀 더 차를 몰았더니 "한번 세워보소" 했다. 관해암 바로 옆이었다. "저기 옛날 집이 남아있네. 저(저기)가 죽은 이두원 씨 안사람 집 아이가!"

거기엔 흙집이 아니라 벽돌집이 한 채 남아있다. 힘들게 수풀을 헤치고 내부로 들어갔더니 기거했던 흔적이 있다. 용호개척단의 남은 흔적이었다.

점빵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씨가 말했다. "난 (경북) 상주생이라. 어머이랑 강원도 묵호까지 가서 안 살았나. 그라다 전쟁이 터져서 진해로 피란을 왔지." 그리고 서른둘부터 아흔까지 그의 생이 듣도 보도 못했던 창녕 용호늪에 걸려버렸다. 그는 가끔 '싱긋이' 웃었다. 허허로운 웃음이었다. "다 죽고 내만 안 남았나. 내가 맹(명)이 참 길다…."

전점석 경남람사르환경재단 대표는 가끔 용호늪을 찾는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 당시 보릿고개 극복을 위해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개간사업을 벌였다. 용호개척단은 박정희 정부의 국토재건운동에 내몰린 사람들이었다."

전 대표는 이런 의견을 내놨다. "습지보호 측면에서도 용호늪 개간은 마무리돼야 한다. 지금도 늪은 개간지 외에 3분의1 정도 남아있다. 나머지는 합법적으로 개간작업을 마무리하게 하고, 남은 습지라도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천연기념물인 재두루미와 황새가 날아든다. 먹이가 되는 벼 낟알이 많기 때문이다."

개간 주체인 대합기업농장 현장 관리인은 부정적이었다. "개간작업한 지 오래됐다. 돈은 없고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하지 못한다." "왜 환경단체에서 이 문제에 자꾸 끼어드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남아 있는 습지는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환경단체가 한 일을 생각하면 상대도 하기 싫다."

1980년대에 이미 끝난 개간작업이 끝날 경우, 준공허가권자는 경남도다. 이 업무를 맡고 있는 도 친환경농업과 관계자는 "자본금 부족으로 작업이 중단된 상태다. 개간 허가가 난 32만 2605평 전체가 개간된 것도 아니고, 준공허가에 필요한 시설조건이 갖추어진 것도 아니다. 지금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답이 없다"고 했다.

민간이 개간을 시작했지만, 공공 형태로 개간을 완료할 수 없을까. 도 관계자는 "한때 창녕군이 경지정리를 추진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민간개발 과정에서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도 있고, 지금 와서 공공 개간이 가능하겠나"라고 말했다.

3분의 2쯤 개간된 용호늪, 그곳에는 기억도 기록도 희미해져 가는 용호개척단의 사연이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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