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유지 준다는 정부 호언 믿고
1960년대 이주해 용호늪 개간
비만 오면 물 차 속 썩기 일쑤

창녕군에는 50년 전까지 우포늪 크기의 자연늪이 하나 더 있었다.

낙동강과 가까운 대합면 용호마을에서 산을 끼고 구미마을로, ㄷ 자 모양으로 오른쪽 위 목단마을로 이어졌던 용호늪이다. 넓게 잡아 65만 평 규모였던 이 늪에서 32만 평 정도는 그사이 개간이 진행됐다. 인근 용산마을의 정미소 맞은편에서 '점빵'을 하는 이춘자(90) 씨는 개간 이야기만 나오면 '학'을 뗀다.

"말 몬한다. 땅을 돋아나먼(돋우어 놓으면) 물 담고 돋아나먼 물 담고…. 고생할 때는 진짜 누구 모가지라도 잡아서 씹었으면 싶었다."

이 씨는 나이 서른둘이던 1964년 "국유지를 개간해서 논으로 만들면 소유권을 넘겨주겠다"는 박정희 정부 강권으로 이웃 30여 가구와 함께 진해에서 이주했던 '용호개척단'의 마지막 현지 생존자다.

당시 진해 해군작전사령부 확장으로 터전을 잃고 쫓겨온 그들에게는 "개간하면 전부 다 너희 땅"이라는 호언뿐, 단 한 푼의 돈도 장비도 주어지지 않았다. "논밭을 만들라카는데 삽으로 괭이로, 심지어 손으로 메꾼다꼬 물구덩이가 바로 논밭이 되나."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국유지 개간 역사의 현장이다. 그렇게 용호늪에 얽힌 지 60년이 돼버린 이 씨의 인생사를 3회에 걸쳐 전한다.

▲ 창녕 용호개척단의 마지막 현지 생존자인 이춘자 씨가 1960년대 용호늪 개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일균 기자
▲ 창녕 용호개척단의 마지막 현지 생존자인 이춘자 씨가 1960년대 용호늪 개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일균 기자

이춘자 씨 가족은 남편과 아들 한 집, 또 친정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이 살던 친정집 등 두 집이 함께 창녕으로 왔다. 이 씨는 진해에서 이주한 과정에 대해 "속아서 들어온 게 아니다. 원해서 들어왔다"고 기억했다. 함께 들어왔던 '조철댁'도, 말을 자주 탔던 이 노인도, 홍 노인도 "창녕에 가면 40마지기 논을 준다"는 개척단장 이두원 씨와 총각이었던 박관규 씨 말에 설득돼 스스로 원해서 들어왔다고 했다.

하지만 관련 보도와 관계자 증언을 종합하면 이 씨의 기억은 정확한 내용이 아닐 수 있다.

나중에는 먼저 들어간 진해 사람들 추천으로 대구와 상주, 점촌 지인들까지 모두 40가구가 지금은 절(관해암) 자리가 된 옥산마을 군데군데에 흙집을 짓고 용호늪 개간에 뛰어들었다. 이 씨는 용호늪을 '용장벌'이라고 했다.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집이 전부 오막살이 아이가. 기서 들어갔다. 돌 쌓아가꼬(쌓아 가지고) 흙으로 붙있는데 발로 차면 무너짓다. 비 오고 툭툭 차먼 집이 없어짓다. 흙으로 '지점지점' 지 났으니 그렇지."

▲ 창녕군 대합면 주민 방범석 씨가 옥산마을 쪽에서 예전 용호늪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이일균 기자
▲ 창녕군 대합면 주민 방범석 씨가 옥산마을 쪽에서 예전 용호늪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이일균 기자

"개간? 그런 기 오데 있노. 우리가 손으로 논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락 숭구먼(심으면) 물 차고 숭구먼 물 차고. 강냉이죽만 묵고 10년을 그 짓을 안 했나."

"땅을 돋아나먼 비만 오먼 물이 확 들어와 한강이 됐다. 그걸 흙집에 구멍만 내놓고 내다보고 울고불고 안 했나. 비만 오먼 나무도 없고 풀도 다 죽고 아무것도 없다. 결국에 논도 하나 몬 만들었다."

"한 해는 좀 높은 데 감자를 심었는데 잘 됐지. 그런데 비가 마이 와서 물 담아삣다. 그래 울면서 감자를 건져내는데 금방 썩어삐데. 감자는 물 가면 안돼. 곡식은 한 번도 몬했다."

계획했던 용장벌 개간이 안 되니 남의 집 농사라도 지어야 했다. 그래야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다.

"농사가 안되이 지방(이곳) 사람들 모심으라카먼 모심고, 논둑 고르라카먼 야전삽으로 논둑 고르고. 그래도 돈 안주대. 일 없으먼 고구마이삭 삶아 묵고. 말 할라카먼 우예 다하겠노? 고생 고생할 때는 진짜 누구 모가지라도 잡아서 씹었으면 싶었다."

"늪에 연꽃대가 안 많았나. 연꽃대라는 게 키가 이래 크다. 나무도 몬하고 그거 캐서 불때고 했지. 나무 없으먼 저 멀리 성산까지, 얼마나 머노. 나무도 마이 해올 수 있나. 요만큼 갈비 해 갖고 오다가 몇 번이나 쉬고 그 고생을 누가 알겠노. 말도 몬한다. 그걸 그리 10년을 안 했나."

비만 오면 물이 차던 곳이었지만 그렇게 땅을 개간하면 전표를 받았다. 나중에 땅 소유권으로 바꾸게 해주는 증표였다. 그러나 이 씨는 끝내 이 증표를 불태워버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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