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결정서 여성 소외 실태조사
여민회 '성평등마을규약'만들어
설득·교육 통해 신도3리 등 시행
각지로 확산·배우러 찾아오기도

제주도는 섬이라는 특성상 마을공동체가 육지보다 활성화된 지역이다.

마을규약(향약)도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한다. 이장도 마을 대소사 결정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자리다. 그러나 마을에서 여성은 '며느리'일 뿐이다. 부녀회가 경로잔치, 체육대회, 마을 포제(제례) 음식을 장만하는 등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반면 마을 규약상 의사결정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제주여민회(이하 여민회)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제주도연합은 이 점에 주목했다. 생활정치가 중요하다고 봤다. 마을규약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고 전국 최초로 '성평등마을규약'을 탄생시켰다.

▲ 제주여민회가 2019년 11월 15일 2019 성평등마을규약 표준조항 마련 및 공론화 사업 결과공유회를 열고 있다.  /제주여민회
▲ 제주여민회가 2019년 11월 15일 2019 성평등마을규약 표준조항 마련 및 공론화 사업 결과공유회를 열고 있다. /제주여민회

◇성평등마을규약의 시작 = 과정은 이렇다. 2018년 12월 여민회는 '마을 여성대표성 제고를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제주지역 마을 여성의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애월읍과 조천읍 2개 지역 20개 이 부녀회장 등을 심층면접조사해 마을 조직 활동과 의사결정 과정을 살폈다.

조사 결과, 마을에는 이장을 보조해 각종 사무를 수행하는 사무장을 1명 또는 마을 규모에 따라 2명 이상 두고 있었다. 그런데 1개 마을을 제외하고는 여성이 사무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급여 등 근로조건은 취약했다.

또 마을의 핵심 의사결정 기구인 개발위원회(15∼20명 규모)에는 이장 또는 전직 이장이 당연직으로 위원장이 되는 등 남성 참여율이 높았지만, 여성 참여비율은 최대 20% 정도에 불과했다. 현직 부녀회장 1명만 참여시키는 마을도 절반 수준이었다. 개발위원은 남성이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팽배했다.

여민회는 이 조사를 바탕으로 성평등마을규약 표준안을 제시했다. 성평등마을규약에는 이장 투표 방식을 '1가구 1표제'에서 '1인 1표제'로 바꾸고, 공평한 공동체노동(경로잔치 등 행사) 분배 등이 담겼다. 특히 개발위원회 성별 균형을 위해 여성 할당 40%를 명문화했다. 부녀회 독립공간 확보와 마을 사무장의 위상 재정립, 마을 구성원별 성평등 교육 강화도 권고했다.

정이은숙 여민회 정책위원장은 "여성 대표성을 높이려면 정치 분야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 생활에서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마을 조사를 시작했고 의사결정 구조에서 여성이 배제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을규약은 마을 헌법과 같은 것으로 이장 선거(1가구 1표제 혹은 1인 1표제), 개발위원회 구성 등 중요한 사항이 다 들어있다. 여성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성평등마을규약을 추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득 과정과 마을의 변화 = 성평등마을규약 시행을 위해서는 설득이 필요했다. 여민회는 2019년 표준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큰 마을을 물색했다. 열린 마음을 가진 마을 이장, 여성 참여 의식이 높은 부녀회장 등을 수소문해 대정읍 신도3리 등 3곳을 후보에 올렸다.

여민회가 처음 성평등마을규약을 들고 갔을 때 첫 반응은 '우리 마을은 평화롭고 화목한데 왜 바꿔야 하느냐'였다. 지속적으로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바꿔야 겠네'라는 생각에 이르게 하는 설득과정이 필요했다.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주에서의 의사 결정과 여성 대표성 현실을 주제로 강의했다. 또 여성주의 영화도 함께 봤다. 그러자 남성들의 인식이 바뀌고 성평등을 자각하면서 표준안을 받아들이게 됐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이런 성과는 파급력이 상당했다. 여성농민회 회원들이 있는 마을에 소문이 나고, 충남 부여에서도 여성 리더들이 찾아왔다. 규약 하나를 바꾸자 각 지역에서 벤치마킹을 위한 강의 요청이 쇄도했다.

양희주 여민회 사무국장은 "행정에서 성평등마을규약을 정책적으로 소개하고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으면 한다"며 "시민단체가 연구하고 활동해 만든 좋은 정책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행정의 몫"이라고 밝혔다.

◇인식 개선 위해선 교육이 중요 = 현진희 신도3리 부녀회장은 성평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주여농 회장을 지낸 현 부녀회장은 "성평등이 중요하다고 인식할 계기가 없는 남성들을 깨우는 교육 프로그램이 큰 힘을 발휘한다고 본다"면서 "마을 영농교육 때도 성평등 교육을 해야 한다고 20년째 요구하고 있는데 들어주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시골에서는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왜 성평등이냐고 묻는 때가 많다. 제주에서는 여성이 혼자가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 농지를 소유한 여성도 별로 없다. 도 차원이든 정부 차원이든 운동으로 확산해야지 개별 가정에서 성평등을 하라고 하면 단 1%도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주 이장 172명 중 5명만 여성이라는 점을 들며 한 마을에서 여성이 이장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노인회에서 강력하게 반대해 좌절된 사례를 이야기했다.

여성의 역량 강화가 필요한 점도 강조했다. 성평등마을규약 도입 후 신도3리 개발위원회에는 여성 5명이 참여하고 있다. 여성 참여 비율이 대폭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개발위에서 여성의 발언은 저조하다.

현 부녀회장은 "쓰레기 수거장 문제 같은 사안이나 예산 관련 논의에 적극 나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단체 활동 해본 여성들은 의사 결정 과정을 알고 단련이 돼있지만, 처음 참여하는 여성은 훈련 기회가 없어서인지 발언 자체를 잘 안한다. 여성 스스로 훈련해 역량을 높이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주여민회는 = 1987년 창립해 34년째 제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진보여성단체다. 한국여성민우회와는 다른 자생단체로 '여민회'는 약칭이 아닌 정식 명칭이다. 8개 위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여성영화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제주여민회 실태조사에 담긴 여성들 말·말·말

○…마을 포제(제례)할 때 여자들은 출입금지. 그렇지만 웃긴 게 음식이나 일하는 건 여자들. 그냥 정말로 남자들이 편리해서 여자들을 중간 일만 시키면서 놓은 거지. 정말 포제에 여자들을 금기시킨다면 그것(음식 장만 등) 또한 본인들이 해야지 그건 자기네들이 안하니까.

○…부녀회장은 그냥 뒤에서 일이나 하는 사람이야. 보통 수습, 뒤치다꺼리, 허드렛일. 그런 식으로만 인정돼. 무슨 행사를 진행하거나 의전활동들은 남자들이 하고, 뒤에는 우리가 하고. 뒤에서 밥하고.

○…심히 불만스럽습니다. 무슨 행사 하고 나면 고생했다고만. 무슨~ 음료수라도 하나씩 사다줘야지, 박카스라도 하나 사와그네. 근데, 너무 당연하듯이 말만 하니까.

○…공문 내려오면 이장님께 보고하고,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도 보고 농사 업무들, 재해 같은 거 일어나면 읍사무소에 중간적으로 연결해주는 일을 하는 거죠. 그냥 잡일 하는 거예요. 이장님은 지금 준공무원이에요. 그런데 사무장은 그렇지가 않아요.

○…남자들이 여자를 안 뽑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진짜 그거라. (선거로 하는 거니까)남자가 여자보다 못한데도 이장 하거든? 여자가 이장 한다고 하면 다들 웃을 걸? "아이고 누구 집 각시 이장 하려고 한다", "무사 너네 각시 설치게 놔시니~"라고.

○…개발위원회에 여자들 수가 작은 건 안 좋게 생각하지. 여자가 남자에 비해서 작으니깐 위축감이 있지, 남자들 시커먼한 사람들이신디 여자들 3방울 앉아 이신디게, 분위기도 애매하고, 찬성이나 하고, 짜증이지.

○…개발위원회 같은 것도 농협 대의원 하는 것도 거의 다 남자들만 해. 여자는 한두 명인가? 그런 것도 이장이나 개발위원장이 추천해가지고 여자가 없지. 이장이 조금 일하기 편하게 말 잘 나눌 수 있는 남자를 뽑으니까.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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